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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 않는 손님을 위한 배려

태백선 연하역

플랫폼에서 본 연하역.

1957년 3월 10일 보통 역으로 영업 개시, 1993년 화물 취급 중지, 1996년 배치 간이역으로 격하, 2001년 신호장으로 격하, 2005년 무인 신호장으로 격하, 2008년 여객 취급 중지. 태백선 연하역의 짧은 역사를 보면 우리나라 시골 간이역이 어떤 과정을 거쳐 작아져가는지 알 수 있다.

Editor 임병국(작가)

옛 겨울, 연하역에서 만난 역무원

2004년 겨울, 태백선 연하역에서 만난 친절한 역무원을 기억한다. 밤 9시가 넘었음에도 아직 남은 일이 있어 마무리하고 계셨는데, 일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그냥 가겠다고 말하자 조금만 기다리라며 굳이 맞이방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역 내부는 아늑했고, 석유난로에서는 모락모락 따뜻한 열기가 피어나고 있었다. 가지런히 정돈된 역사 내부는 발 디딜 틈 없이 어질러진 내 방과 너무도 달랐고, 지나가는 화물열차를 안전하게 통과시키느라 잠시 분주한 시간이 지났다. 창밖으로 보이는 연하역에는 볼거리가 별로 없었다.

아담한 역사가 예쁘기는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두 평 남짓한 맞이방은 손님이 찾지 않은 지 오래된 듯 먼지가 가득했고, 한쪽 구석에는 거미줄과 잡동사니가 쌓여 있어 창고 대신 쓰고 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것이 어차피 찾아 올 사람 없는 간이역의 현실인 것을. 인상 좋은 부역장님, 고향이 경북 상주인 역무원님과 대화를 나누었다. 어쩌다 화제가 간이역에 이르자 그동안 답사한 다른 간이역 이야기를 해드렸는데, 두 분이 생각보다 큰 관심을 보이셨다. 다른 기차역은 역 주변을 어떻게 꾸미고 있는지 궁금하다고 묻기도 했고. 그래서 장항선 신례원역 구내에는 가을이면 수세미와 표주박이 주렁주렁 매달려 기차역을 드나들 때면 기분이 확 좋아진다는 얘기, 동해남부선 나원역 광장 앞 토끼 농장에는 토끼가 100마리쯤 살고 있다는 얘기, 경부선 대신역에 가면 역 앞 광장이 하나의 거대한 공원이 되어 있더라는 얘기, 단양역에 가면 역 광장에 도담삼봉과 달리지 못하는 카페 열차가 있다는 얘기까지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내 이야기를 하나하나 수첩에 적는 모습을 보고 살짝 당황스럽기까지 했는데, 갑자기 책 이야기를 꺼냈다. “혹시 댁에 안 읽는 책 있으면 다음에 오실 때 갖다주세요. 심심할 때 읽게.” “네, 책요? 아… 알겠습니다.” 의외의 부탁에 약간 당황했지만, 남은 커피를 마시고 두 분께 작별 인사를 했다. “밝은 날 또 오겠습니다. 거리가 멀지만, 좋은 분들이 계시니 꼭 다시 들러야지요.” “안녕히 가세요. 아마 다음에 오시면 놀라실지도 모릅니다.” 무슨 뜻일까? 설마 연하역이 무인 간이역으로 사라지거나 신축된다는 뜻일까? 금방 다시 갈 수 있을 것 같던 연하역 방문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석 달이 지난 후에야 가능했다. 그것도 지나가다 허겁지겁 들러야 할 만큼 힘들게 방문했다.

한 사람만을 위한 공간이 된다 해도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이곳은 내가 알던 그 연하역이 아니었다. 역사는 미색 벽과 녹색 지붕으로 새로 도색되어 깔끔해졌고, 입구에는 연하역 가는 길을 안내하는 나무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맞이방 문을 열자 창고 같던 공간이 잘 꾸민 학교 교실처럼 아담하고 아기자기하게 변해 있었다. 맞이방 벽에는 그곳에 근무하는 역무원들의 사진이 학교 환경판처럼 걸려 있었고, 잡동사니 가득하던 구석에는 30년 전에 보던 초등학교 책상과 걸상이 들어서 있었으며, 반대편에는 귀여운 통나무 벤치 5개와 나무 탁자가 놓여 있었다.

역 구내에는 원두막이 새로 생겼고, 플랫폼으로 가는 길에는 예쁜 청사초롱이 매달려 있었다. 원두막에는 표주박이 주렁주렁 달려 있고, 철길 옆으로는 알록달록한 꽃들이 줄지어 심어져 있었다. 그야말로 몇 달 사이에 ‘천지개벽’을 한 것이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요?” “하하…. 그날 이후로 역 꾸미느라 신경 좀 썼지요.” “이렇게 엄청난 일을 혼자서 하셨을 리는 없고….” “혼자서 다 했어요.” “헉!” 정말 놀라운 일이었다. 방 하나 꾸미는 데도 몇 달이 걸리는데, 석 달 만에 기차역 하나가 놀이동산으로 완전히 탈바꿈한 것이다. 갖고 온 중고 책 몇 권을 책상 위에 마련된 공간에 꽂아두었다. 한 사람의 노력이라 하기에는 너무도 달라진 모습이었다.

아쉬운 점은 승객이 하루 1명 내외여서 봐줄 사람이 없다는 것. 그래도 그는 흐뭇해했다. 찾는 사람은 없었지만, 2004년이야말로 연하역의 전성기가 아니었을까? 무인 간이역으로 격하된 뒤, 다시 연하역은 이전 모습으로 돌아갔다. 기차는 더 이상 서지 않고, 역 앞에는 왕복 4차선 국도가 생겼으며, 도로에서는 가까워졌지만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곳이 되었다.

사진으로나마 연하역의 전성기를 남겨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얼핏 듣기로는 연하역 무인화 이후 조동 신호장역으로 근무지를 바꾸셨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름도 모르지만 경북 상주가 고향인 솜씨 좋고 친절하신 역무원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태백선 연하역의 아름다운 모습과 함께.

가지런히 정돈한 역무실 내부와 오지 않는 손님을 위한 나무 의자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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