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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하나 경부 철도 부설

1900년경 어느 날, 경기도 수원, 젊은 부부가 소달구지에 살림살이를 싣고 길을 떠났다. 이봉창 의사의 아버지 이진구 씨와 손씨 부인이 조상 대대로 살던 집과 전답을 뒤로하고 한성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집과 전답이 철도 부지에 들어갔으니 집을 비워라. 값은 훗날 계산해서 치르겠다.” 일본이 경부 철도 부설권을 차지하면서 날벼락이 떨어진 것이다. 일가는 용산에 짐을 풀었고, 그곳에서 1901년 8월 10일 이봉창 의사가 태어났다. 세 아들 중 둘째였다.

풍경 둘 용산역

을사늑약과 경술국치를 당한 나라의 운명처럼 가세도 기울었다. 이봉창 의사는 4년 과정의 보통학교를 마치자마자 열다섯 나이에 돈벌이를 시작해야 했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과자 가게가 첫 직장이었다. 사교성이 뛰어나고 일본어에 능한 이봉창 의사는 2년 후 보다 나은 일자리를 찾아 한강로에 있던 약국으로 직장을 옮겼다. 이곳에서 철도국에 근무하는 직원을 알게 되었는데, 그의 소개로 용산역에서 임시 역부(驛夫)로 일하게 되었다. 만세 운동이 일어난 1919년, 열아홉 살 때였다.

이봉창 의사는 용산역에 근무한 지 5개월 만인 1920년 1월 16일, 시용부(試傭夫)에서 정식 역부가 되었다. 임시 잡부에서 정규직이 되었으니 승진한 것이다. 역부 이봉창에게 주어진 보직은 전철수(轉轍手)였다. 그리고 8개월 후 연결수(連結手)로 보직이 바뀌었는데, 지금으로 치면 모두 수송(輸送) 담당 역무원에 해당한다. 업무 특성상 늘 위험이 따르는 일이어서 당시에도 작업 중 사상자가 발생하곤 했는데, 이봉창 의사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업무 과중이나 위험 요소가 아닌 차별 대우였다.

일본인은 쉽게 승급과 승진을 하는데,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승진에서 누락되고 차별 대우를 받게 되자 이 의사는 일할 의욕을 잃고 말았다. 처음에는 식민지 백성으로서 현실을 받아들여 체념하려 했다. 하지만 차별받는 생활이 길어지면서 자포자기 상태가 되어 술과 도박에 손을 대는 등 삶도 무너져 내렸다. 그렇게 만 5년을 채우지 못하고 철도인으로서의 삶이 끝났다. 민족의식은 없지만 자존감이 강한 이봉창 의사에게 철도가 가르쳐준 것은 ‘조선인은 일본인일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봉창

이봉창 의사 동상.

풍경 셋 교토역

1928년 11월 6일 밤, 3명의 청년이 교토역에 내렸다. 이봉창과 그의 친구 최순평, 직장 동료 마에타 세이지였다. 이들은 11월 10일 열리는 일본 천황 히로히토(裕仁)의 즉위식을 구경하기 위해 오사카에서 전차를 타고 온 것이다. 그런데 그다음 날 이른 아침 행렬 참관석에서 경찰에게 몸수색을 당하게 되었다. 동료 2명은 아무 일 없이 통과했는데, 이봉창 의사는 양복저고리 주머니에서 나온 한글과 한문이 섞인 편지 때문에 경찰서 유치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감금된 지 9일째 되던 11월 15일, 아무런 조사도 하지 않고 가둬놓기만 하는 것이 답답해 조사를 독촉했다. 편지 내용을 일본어로 번역해주고 잘 알고 지내던 경찰관 이름을 대자 석방해주었다. “일부러 돈까지 써가며 교토의 유치장을 구경하러 온 것이 아니다. 나는 폐하를 뵈러 온 것이 아닌가…. 한글이 섞인 편지를 갖고 있다고 해서 무엇이 나쁜가…. 역시 나는 조선인이다. 조선인 주제에 일본 천황 같은 것을 볼 필요는 없는 것 아니냐. 그렇기 때문에 벌을 받아 유치장에 갇히게 된 것이다.”

풍경 넷 도쿄 하라주쿠역

1932년 1월 8일 오전 8시 50분경, 도쿄 중심가 하라주쿠역에 말쑥한 차림의 한 신사가 기차에서 내렸다. 그는 정장에 검은 오버코트를 입고, 올백으로 빗질한 머리에 헌팅캡을 눌러 쓰고 있었다. 한 손에는 수류탄 두 발이 든 보자기가 들려 있었다. 이봉창 의사였다. 이날 인근 요요기 연병장에서 열리는 육군 시관병식(始觀兵式)에는 일본 천황이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오전 11시 45분경, 도쿄의 치안을 책임지는 경시청 현관 앞에서 고막을 찢을 듯한 폭발이 일어났다. 일본 천황 일행을 향해 이봉창 의사가 던진 수류탄이 터진 것이다. 폭발음에 비해 위력이 강하지 않아 인명 피해는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이봉창 의사는 이른바 대역죄로 사형을 언도받았고, 1932년 10월 10일 오전 9시 2분 도쿄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일부러 돈까지 써가며 교토의 유치장을 구경하러 온 것이 아니다. 나는 폐하를 뵈러 온 것이 아닌가…. 한글이 섞인 편지를 갖고 있다고 해서 무엇이 나쁜가…. 역시 나는 조선인이다. 조선인 주제에 일본 천황 같은 것을 볼 필요는 없는 것 아니냐. 그렇기 때문에 벌을 받아 유치장에 갇히게 된 것이다.”

이봉창 의사의 묘소.

풍경 다섯 부산역

1946년 6월 16일, 비가 내리는 가운데 부산역에서는 고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의 영결식이 열렸다. 영결식이 끝난 후 세 의사의 유해는 김구 선생의 인도로 봉안 열차 ‘조선해방자호’에 실려 부산역을 출발했다. 서울역에 도착한 이 의사의 유해는 태고사 봉안소에 안치되었다가 1946년 7월 6일 국민장을 거행해 효창원에 자리를 잡았다. 이봉창 의사가 태어나서 자란 곳이자 처음 민족의식에 눈뜬 곳, 용산에 영원히 잠든 것이다.

이봉창 의사의 의거는 전 세계에 큰 울림을 주었다. 제국의 심장 황궁 입구, 경시청 정문 앞에서 터진 폭탄 한 발에 일본 이누카이(犬養) 내각은 총사퇴서를 냈고, 중국 정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공식 협력 관계를 맺고 지원에 나섰다. 임시정부는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고, 그 효과는 얼마 후 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나타났다. 차가운 두 가닥의 철길은 그의 부모로 하여금 정든 고향을 등지도록 했지만, 이 의사에게는 굳은 철심(鐵心)을 심어주었으며, 종국에는 조국의 품으로 인도했다. 이제 그 길이 다시 우리 앞에 펼쳐졌다. 대륙을 넘어 침략과 착취의 길이 아닌 공동 번영과 상생의 길을 우리는 열어야 한다. 살아생전 이봉창 의사가 꿈꾸던 그 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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