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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귀성 전쟁은 산업화의 산물

‘귀성 전쟁’이라는 말은 도시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1970년대부터 생겨났다. 1960년대 이후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주한 사람이 크게 늘어나면서 귀성 전쟁이라는 새로운 풍속도가 펼쳐진 것이다. 그럼 그 전에는 어땠을까? 객지에 사는 자식이 부모를 찾아가는 것을 귀성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 이 단어가 등장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다. 현대식 교육을 받기 위해 도시로 유학 온 학생들이 방학마다 농촌의 고향 집을 방문하면서 ‘학생 귀성’이란 말이 생겨났고, 학생들이 기차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학생 귀성열차’라는 말도 등장했다. “고향 가까운 사람들은 부모형제 모여 앉아 송편 한 개라도 달게 먹으려고 고향으로 다니러 가는 사람이 많다는바, 추석날은 마침 토요일이므로 학생들도 일찍 공부를 마치고 나오리라는 데 금년에는 여러 가지 재앙으로 연사가 전만 못함으로 따라서 추석놀이도 전에 비하면 매우 쓸쓸하리라더라.” 1924년 9월 12일 자 동아일보 ‘임박한 추석과 가을의 선물’ 기사에 묘사된 당시 추석의 모습이다. 광복 전까지 추석은 휴일이 아니었기에 학생들이 주말을 끼고 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또 일가친척이 가까운 곳에서 대가족을 이루며 사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추석이라고 해서 대규모 귀성은 없었다. 그러나 광복 후 만주나 일본 등지로 이주한 해외 동포가 고향을 찾고, 1949년 추석이 법정 공휴일로 지정되면서 고향을 찾는 이가 대폭 늘어났다. 당시 귀향길의 길동무는 당연히 기차였다.

1976년, 추석을 이틀 앞두고 용산역에서 오후 6시 45분발 목포행 열차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귀성객들.

기차표를 사려고 역 광장 노숙도 불사

“서울역 광장에는 차 탈 사람들이 문자 그대로 입추의 여지가 없이 들어섰다. 서울역 오후 5시 45분발 열차는 개찰도 하지 않았는데, 용산에서부터 초만원이 되었다.” 1949년 10월 7일 자 경향신문은 추석 하루 전날 서울역 풍경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러나 이듬해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다소 한산해졌다가 정전협정이 이루어지고 다시 혼잡해졌다. 밀려든 귀성객의 대규모 무임승차로 열차가 연착하는 등 지연 운행이 극에 달하기도 했다. 열차 귀성객이 폭증하자 정부는 1955년에는 미군에 객차 10량을 긴급 요청해 투입했으며, 1956년에는 명절에만 특별열차를 운행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역부족이었다. 고향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서는 귀성 전쟁을 치러야 했는데, 차표를 구하는 것부터 시작이었다. 당시에는 역 매표 창구에서만 표를 살 수 있었기에 예매 며칠 전부터 역 광장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밤새우며 기다려야 했다. 경찰과 공무원은 새치기와 소란을 막기 위해 곤봉이나 장대를 들고 대기 행렬을 통제하기도 했다. 서민이 정원 초과로 열차표를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와중에 일부 국회의원은 역무원에게 특권을 요구하는 등 추태를 부리기도 했다.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지만. 상황이 이렇다 보니 비극적 사고도 일어났다. 1961년 설에는 서울역에서 압사 사고가 발생했다. 설날을 앞두고 밤 10시 50분에 출발하는 서울발 목포행 완행열차가 출발 5분을 남기고 개표를 시작하자 승객이 서로 먼저 좌석을 차지하려고 뛰는 바람에 계단에서 넘어져 31명이 압사하고 38명이 중경상을 입은 참사가 발생했다. 1970년대에도 이러한 사고가 여러 번 일어났다. 모두 좌석을 지정하지 않는 완행열차에서 발생한 비극이었다. 승객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열차 스프링이 내려앉는 등의 사고도 잇따랐다. 다행히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고속도로가 건설되기 시작해 본격적인 고속도로 시대가 열리면서 많은 사람이 귀성길 차편으로 고속버스를 선택했다. 철도를 이용한 귀성객은 1969년 60만5000여 명이었으나 1970년에는 36만 명 수준으로 줄었다. 출발 간격이 짧고 정류장이 가까운 고속버스를 선호한 것이다. 역 앞에서 펼쳐지던 혼잡한 귀성길 풍경은 고스란히 고속버스터미널로 옮겨갔다. 이렇듯 승객이 늘자 고속버스가 입석 승객을 받는 위험천만한 일도 빈번했다. 

1972년, 기차표를 예매하기 위해 노숙도 마다하지 않고 기다리는 귀성객들.

1972년, 기차표를 예매하기 위해 서울역 광장에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귀성객.

귀성열차에는 정원의 3배에 가까운 승객을 태우기 때문에 고향까지 서서 가는 승객이 더 많았다. 선반 위에라도 올라탄 사람은 행운아였다.

2004년 KTX 개통과 함께 승차권을 인터넷으로 구하는 홈티켓이 정착되었다.

KTX 개통과 함께 홈티켓 정착

고속버스로 승객이 분산된 데다 승차권 예매 제도를 시행하면서 추석 당일 서울역 등 주요 기차역의 혼잡은 줄어들었다. 그러나 1985년에는 설날 당일이, 1989년부터는 설·추석 명절을 포함한 3일이 모두 공휴일로 지정되면서 명절에 귀향하는 시민이 크게 늘었다. ‘민족 대이동’이라는 용어가 생겨났고, 고속도로 혼잡이 시작된 것도 이즈음이다. 이후 승용차의 증가로 고속도로 정체가 절정에 달하면서 제2의 귀성 전쟁이 시작됐고, 사람들은 막히지 않는 철도로 다시 눈을 돌렸다. 철도청은 원활한 귀성을 위해 1989년부터 직장이나 가정에서 전화 한 통으로 철도 승차권과 좌석을 예약할 수 있는 철도 승차권 예약제를 실시했다. 역 광장에서 노숙하며 대기하지 않아도 된 것이다. 전화통을 붙잡고 예매에 성공했다는 보도가 잇따랐다. 하지만 전화가 먹통이 되는 등 미숙한 점이 드러났고, 1990년 연말에는 표를 구하지 못한 철도 전화 예약 회원들의 격렬한 항의가 잇따르는 문제가 발생했다. 회원들은 “2만 원을 미리 예치해 회원이 됐는데 정작 필요한 때 표를 예매하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면서 불만을 터뜨리는가 하면, 직접 역으로 찾아와 항의하기도 했다. ‘PC통신’ 전성기인 1990년대 중반부터 역과 터미널 앞에 길게 늘어선 예매 줄은 모니터로 옮겨갔고, 혼잡을 피해 서울의 가족, 친지를 찾는 ‘역귀성’이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이후 다양한 예매 방법을 시도하다가 2004년 KTX 개통과 함께 승차권을 인터넷으로 구입하는 홈티켓이 정착되었다. 철도청은 그해 추석부터 인터넷 홈페이지 ‘바로타’(현재의 레츠코레일)에서 전체 승차권의 60%를 판매하며 첫 인터넷 예매를 시작했다. 이날 인터넷 예매분으로 준비한 열차표 17만4000여 장은 두 시간 만에 거의 동이 나고 말았다. 이후 집에서 편리하게 예매할 수 있는 인터넷 철도 예매가 대세였고, 긴 줄로 상징되던 명절 열차표 예매는 ‘대국민 수강 신청’이라 불리며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다. 작년부터는 모바일로도 승차권을 예매할 수 있다. 디지털 시대가 연 새로운 풍경이다.

 

승객의 안전과 신속한 수송에 만전을 기하는 코레일

추석 연휴가 되면 전국 주요 기차역은 고향으로 떠나는 인파의 대규모 수송을 시작한다. 이에 코레일은 특별 대책을 마련해 승객의 안전과 신속한 수송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 올해도 귀성·귀경객의 열차 이용 편의를 위해 임시 열차와 중련 열차 등을 편성, 운행 횟수를 늘려 수송력을 증강하며, 안전을 위해 철도차량 응급조치와 신속한 사고 복구 체계를 마련했다. 또 역귀성 등 좌석이 남아 있는 일부 열차를 할인된 가격에 이용할 수 있는 ‘KTX 특별 할인 상품’과 국내 관광 활성화를 위한 ‘넷이서 99,000원’ 할인 상품도 추석 기간에 이용할 수 있도록 연장 운영한다. 완행열차를 운행하던 시절, 서울에서 부산까지 10시간, 목포까지 11시간이 걸렸다. 입석이면 그 긴 시간을 서서 가야 했다. 명절 때는 정원의 3배 이상 승객을 태웠기 때문에 출입문 난간에 매달리거나 선반 위에 올라타기도 했다. 하지만 저마다 고향에 간다는 설렘과 기쁨을 간직한 승객들은 비좁고 불편한 가운데에서도 옆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준비한 간식을 나눠 먹으며 지루한 시간을 달랬다. KTX가 빠른 속도로 전국을 누비는 요즘은 상상할 수도 없는 귀성열차의 풍경이다. 시인 오세영은 ‘고향’이라는 시에서 “그 산등성 너머 흰 연기를 토하고 달리던 하오 두 시 완행열차의 기적이 있어 고향이다”라고 표현했다. 그리움, 설렘, 향수…. 그러고 보면 고향과 기차는 정서적으로 참 많이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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