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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 단순한 교통수단 이상의 의미

사진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예술적 감수성과 과학적 호기심으로 영화 카메라와 영사기를 발명한 뤼미에르 형제는 파리 교외의 역에 카메라를 세워놓고 기차가 역에 도착하는 모습을 찍었다. 바로 영화 탄생을 알리는 최초의 작품 <열차의 도착>. 고작 러닝타임 50초에 불과한 영화였지만, 파리 르 그랑 카페에서 상영했을 때 큰 파장을 일으켰다. 관객들이 실제로 기차가 달려오는 줄 알고 혼비백산해 도망갔다는 카더라 통신이 난무했을 정도. 기차는 사람들에게 단순한 교통수단 이상의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문학, 음악, 그림, 영화 등 예술 분야에 자주 등장한다. 특히 객차라는 제한적 공간 덕분에 멜로면 멜로, 스릴러면 스릴러 등 다양한 분야를 소화할 수 있어 다른 예술 장르보다 영화에 더 안성맞춤인 소품이 되었다.

기차라는 공간은 예기치 않은 만남을 은근히 기대하게 하고, 출발하려는 기차는 이별의 애틋한 감정을 전달하기에 더할 나위 없다. 특히 도망칠 수도, 숨을 수도 없는 좁고 밀폐된 공간이 주는 서스펜스는 가슴을 조마조마하게 만든다. 빠르게 내달리는 속도감은 극단에 선 사람들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극대화해 수많은 액션 영화의 주된 배경이 되기도 한다.

그뿐인가. 미스터리한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로 기차만 한 공간이 없다. 또 1등석, 일반석, 입석까지 각 계층별로 다양한 캐릭터를 보여줄 수 있어 계급별 갈등을 표현하기에 안성맞춤인 공간이다. <설국열차>가 대표적 케이스. 기차 내의 또 다른 공간, 복도나 화장실은 인물 간 사적인 대화나 휴머니즘을 유발하는 공간, 혹은 사건이 벌어지는 공간으로 활용한다. <부산행>의 경우 마동석과 공유가 아버지의 희생정신을 보여줄 때 객실과 객실 사이의 공간을 이용하기도 했다. 지난 2017년 케네스 브래너 감독이 새로 제작한 <오리엔트 특급 살인>. 이 작품은 기차를 응용한 서스펜스 영화로는 단연 압권이다. 1974년 시드니 루멧 감독이 만든 영화를 새롭게 재탄생시킨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이스탄불에서 런던으로 향하는 초호화 열차 안에서 살인 사건이 벌어진 가운데, 완벽한 알리바이를 지닌 용의자 13명과 이들을 파헤치는 세계 최고 탐정 에르큘 포와로의 활약상을 그렸다. 영국 추리소설의 황금기를 이끈 작가 애거사 크리스티의 소설을 원작으로 해 탄탄한 스토리를 자랑한다.

이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은 ‘오리엔트 익스프레스’라는 공간적 배경이다. 오리엔트 익스프레스는 1883년부터 국제 침대차 회사에서 운행하던 유럽 횡단 열차였다. 열차는 호텔 뺨치는 최고급 요리와 디저트, 차까지 마실 수 있는 초호화 열차로, 호화스러운 여행의 동의어가 되었다. 1960년대 이후 교통수단의 고속화로 쇠퇴하기 시작한 오리엔트 익스프레스는 잠시 운행이 중단되었다가, 1982년 5월 미국인 실업가 제임스 B. 셔우드(James B. Sherwood)가 부활시켜 오늘날까지 호화 열차의 대명사로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영화 <오리엔트 특급 살인>의 무대를 직접 경험할 수 있는 ‘베니스 심플론 오리엔트 익스프레스’. 런던~파리~베로나~ 베네치아의 1500km 구간을 운행하는 럭셔리 기차 여행의 끝판왕이다. / 3등급으로 나뉜 객실에는 샤워 시설과 화장실이 있으며, 넓은 창을 통해 멋진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기차는 객차라는 제한적 공간 덕분에 멜로면 멜로, 스릴러면 스릴러 등 다양한 분야를 소화할 수 있어 다른 예술 장르보다 영화에 더 안성맞춤인 소품이 되었다.”

기차라는 소재, 그 이후의 영향력

이 외에도 기차는 스쳐 지나가는 차창 밖 풍경을 통해 영화에는 속도감을 불어넣고, 에피소드가 전환될 때는 멀리서 기차가 달리는 모습을 배치해 영화의 호흡을 조절하기도 좋다. 이렇듯 기차는 영화에 필요한 다양한 요소를 적재적소에 활용할 수 있어 영화 탄생 후 130년 동안, 우리나라 영화의 경우 2016년 <부산행>까지 영화의 단골 소재가 되고 있다. 기차는 영화의 소품으로 극 흐름을 이끌어가기도 하지만, 도시 이미지를 바꾸기도 한다. 대표적 경우가 우리나라 제천시.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박하사탕> 덕분에 석탄과 시멘트 도시이던 제천시가 국제영화제를 개최하는 도시로 탈바꿈한 것이다. <박하사탕>은 철로 시퀀스다.

오프닝 크레디트, 터널이 끝나는 지점에서 철로가 곡선으로 바뀌고부터 영화는 주인공 김영호의 굴곡진 삶을 보여준다. 1999년 봄 장면으로 시작해 과거로 거슬러 갈 때 상징적으로 사용한 것 또한 철로다. “나 다시 돌아갈래!”를 외치며 실제로 기차가 가까이 오는 줄도 몰랐을 정도로 영화에 몰입한 설경구의 연기 덕분에 명장면도 탄생했다. 이 장면은 제천 진소마을에서 촬영했는데, 영화를 보고 진소마을을 찾는 관광객이 늘면서 제천시는 로케이션 유치에 적극 나섰고, 마침내 영상 산업 도시를 꿈꾸기 시작한 것이다. 흥행한 영화나 드라마의 경우 촬영지가 관광 명소로 떠오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제천시처럼 도시의 산업 지형을 바꾼 경우는 흔치 않다.

이처럼 기차는 사람들의 삶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이기도 하고, 그 어느 곳보다 가족의 사랑과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때로는 가슴을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스릴러나 미스터리, 액션을 담는 공간이기도 하다. 가을이 무르익어가는 10월, 문화적 감수성에 젖어보고 싶다면 기차를 주제로 한 영화 한 편 보면 어떨까? 오래된 영화부터 최근 작품까지, 흥행 질주한 기차 영화를 소개한다. 

<설국열차>

감독 봉준호 출연 크리스 에반스, 송강호, 에드 해리스
제작 연도 2013년

<설국열차>는 기상이변으로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은 지구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을 태운 기차를 배경으로 한다. 그곳에서 춥고 배고픈 사람들이 지내는 꼬리 칸부터 선택된 사람들이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앞쪽 칸까지 평등하지 않은 열차 안 세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랜 세월 준비한 폭동과 그로 인해 겪게 되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SF 장르에서도 열차라는 특수한 공간을 배경으로 삼아 큰 호응을 얻었다. 봉준호 감독의 할리우드 진출작으로 뜨거운 관심을 모은 <설국열차>는 다시 찾아온 빙하기, 살아남은 인류를 태우고 달리는 열차라는 독특한 배경으로 눈길을 사로잡았다.

<부산행>

감독 연상호 출연 공유, 정유미, 마동석, 김수안, 김의성
제작 연도 2016년

정체 모를 바이러스가 전국으로 확산해 대한민국에 긴급 재난령이 선포된 가운데 부산행 열차에 몸을 실은 이들의 상황을 다뤘다. 주인공들은 고속열차 안에서 살기 위해, 혹은 지키고 싶은 사람을 위해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와 사투를 벌인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부산행 기차에 몸을 실은 이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기차가 극의 전반적인 배경으로 등장한다. 정체불명의 바이러스는 초고속으로 달리는 열차처럼 빠른 속도로 퍼지며, 보는 이에게 긴박감과 짜릿함을 선사한다. 도망칠 수도, 숨을 곳도 없는 밀폐된 공간으로 인해 스릴감은 더욱 고조된다.

<밀정>

감독 김지운 출연 송강호, 공유, 한지민, 엄태구, 신성록
제작 연도 2016년

<밀정>은 1920년, 의열단 뒤를 캐기 위한 조선인 출신 일본 경찰과 의열단의 이야기를 다룬다. 의열단은 폭탄을 경성으로 들여오기 위해, 일본 경찰은 그들을 쫓기 위해 상하이로 향한다. 김지운 감독은 할리우드에서 주로 사용하는 유압식이 아닌 스핀을 연달아 연결하는 방법으로 총 세 칸의 기차 세트를 제작해 당시 기차의 움직임과 특징을 생동감 넘치게 구현해냈다. 또 인물들이 처한 상황과 감정에 따라 일반 객실과 특실의 밝기와 톤을 달리했다. 비교적 적은 비중으로 기차가 등장하지만, 존재감만은 돋보이는 영화다.

<커뮤터>

감독 자움 콜렛 세라 출연 리암 니슨, 베라 파미가
제작 연도 2017년

가족이 인질로 잡힌 전직 경찰 마이클 맥콜리가 사상 최악의 열차 테러범과 맞서는 과정을 그린 액션 블록버스터다. 영화는 뉴욕 도심을 가로지르는 통근 열차를 배경으로 테러범을 추격하며 극한의 스릴을 자아낸다. 주어진 시간은 열차가 8개 정거장을 지나기까지의 30분. 실시간으로 생중계하는 것처럼 진행되는 속도감 있는 전개가 관객의 심장을 뛰게 한다. 시속 300km로 내달리는 열차 안에서 벌이는 추격전과 총격전, 육탄전을 비롯해 열차 안팎을 오가는 고난도 액션과 대규모 열차 폭발에 이르기까지 스펙터클한 액션 신으로 중무장했다.

<폴라 익스프레스>

감독 로버트 저메키스 목소리 출연 톰 행크스, 제슬리 제멕키스, 피터 스콜라리
제작 연도 2004년

<폴라 익스프레스>는 크리스마스이브, 산타의 썰매 소리를 듣기 위해 기다리던 소년이 자신의 집 앞에 멈춰 선 검은색 기차를 보고, 북극행 특급 열차 ‘폴라 익스프레스’를 타면서 기나긴 여행길에 오르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크리스마스이브, 산타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기차를 타고 떠나는 여행이니만큼 영화의 전반적 이야기가 기차 안에서 펼쳐진다. 또 아직 순수한 아이들이 향하는 여행이라는 점에서 하나씩 발견해나가는 매력이 있는, 기차라는 공간과 그러한 여행길이 지니는 의미가 돋보이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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