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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새해에는 우리나라의 주요 철도 노선 건설에 대해 하나씩 이야기해볼까 한다. 꼭 개통 순서를 따르려는 것은 아니지만, 열두 달 동안 노선 이야기를 하다 보면 우리나라 철도 전반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것이라고 기대한다. 물론 이것은 필자에게도 큰 공부가 될 것이다. 국내 최초의 철도 노선은 물론 경인선이지만, 그 이야기는 이미 많이 썼고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이번에는 경부선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글과 사진 배은선 기자(수도권서부본부 송탄역)

1894년 10월, 청일전쟁이 한창인 시점에 일제는 센고쿠 미쓰구라는 공학박사를 중심으로 한 10여 명의 측량반을 우리나라에 보내 병참사령부의 보호 아래 경부·경인 철도 부설을 위한 정밀 측량을 실시했다. 철도 건설을 일본의 국익을 위한 국책 사업으로 접근한 것이며, 1892년에 이은 두 번째 측량이었다.

 

한반도의 관문, 경부선

경인철도, 즉 지금의 경인선이 수도권의 관문인 인천과 서울을 이어주는 철도라고 한다면 경부철도, 즉 경부선은 한반도의 관문인 부산과 수도 서울을 이어주는 핵심 노선이다. 경부철도에 앞서 경인철도를 개통한 이유는 노선의 길이 때문일 것이다. 당시 40km가 조금 넘는 경인선에 비해 경부선은 430km가 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일제가 정한론(征韓論)이라고 하는 한반도 침략 야욕을 구체화할 때부터 그들이 그리던 철길은 경인선이 아닌 경부선이었다. 그리고 조선이 맨 처음 논의한 철도 부설 노선도 역시 경부선이었다. 1892년 4월(음력) 고종은 미국인 모스를 불러 이완용과 이하영으로 하여금 경부철도 건설을 추진하도록 했다. 구체적으로 자금은 모스가 대고, 그 대신 25년간의 철도 운영권과 5개의 금광 채굴권을 주는 조건이었다. 이 의욕적인 계획은 정병하라는 신하의 결사반대로 무위에 그치는데, 그 배경에는 일제의 입김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종의 명을 받아 철도 건설을 추진한 이완용과 이하영 또한 대표적 친일파로 후세에 더러운 이름을 남겼지만, 당시에는 친일파가 아니었고 영어에 능했기 때문에 미국 쪽과 가까웠다. 경부철도 건설이 무산되자 모스는 우리 조정에 피해 보상을 요구했는데, 왕복 여비와 사업 공백에 따른 비용 1만 원이었다. 1896년 3월 29일 조선 정부가 모스에게 경인철도 부설권을 허가한 데에는 이러한 보상금 요구도 한몫했을 것이다. 건설 자금을 확보하지 못한 모스로부터 경인철도 부설권을 인수한 일본은 경부철도 부설권 확보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일본이 경부선에 끼친 영향

그러면 일본은 언제부터 조선 철도 건설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섬나라 일본이 한반도와 대륙에 대한 야욕을 대규모 군사 행동으로 드러낸 것은 임진왜란이 시초다. 그 이후 쇄국의 길을 걸은 조선과 달리 서구와의 교류를 통해 근대 문명의 이기를 받아들인 일본은 메이지 시대에 이르러 왕권을 강화하며 제국주의 국가의 길로 들어섰다. 1885년 미야자키현 출신의 마쓰다 유키타카(松田行葳)는 의료 활동을 빌미로 조선에 4년간 머물면서 전국의 산과 들을 걸으며 민정을 시찰하고, 지세, 교통, 경제 상황을 조사한 사실이 있다.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간첩인 셈이다. 또 일본에서 ‘우편의 아버지’로 불리는 마에지마 히소카(前島密, 1835~1919)는 한반도를 거쳐 대륙을 통과하고 나아가 시베리아를 경유해 유럽에 이르는 철도의 부설을 예상하고, 한반도 종관 철도를 일본의 힘으로 부설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는 1886년 사철(私鐵) 간사이(關西) 철도회사 사장, 1894년에는 호쿠에쓰(北越) 철도회사 사장으로 철도 건설을 추진한 철도인이기도 하다. 1892년 8월, 일제는 체신성 철도국장 이노우에 마사루(井上勝)의 추천에 따라 철도 기사 고노 덴즈이(河野天瑞, 다른 기록에 가와노 텐즈이, 고노 다카노부 등으로 표기된 인물)를 파견해 서울과 부산 간 선로를 예측했다. 이들은 부산에서 시작해 약 2개월에 걸쳐 총길이 386km를 답사했다. 이것은 부산에서 부산진, 삼랑진, 밀양, 대구, 상주, 청주를 거쳐 남대문에 이르는, 실제 경부선과는 조금 다른 노선이다. 중요한 것은 이 시점이 바로 고종이 우리나라 최초로 경부철도 건설을 시도했다가 무산된 직후이며,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정부 차원에서 은밀히 경부철도 건설을 위한 선로 답사를 마쳤다는 사실이다. 1894년 7월 23일, 청일전쟁을 빌미로 한반도에 군대를 상륙시킨 일본은 참담하게도 청나라와 전쟁에 앞서 우리 왕궁을 먼저 기습 점령했다. 그들은 왕궁을 군대로 에워싸고 친일 인사들로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도록 했다. 그 내각이 내놓은 것이 갑오개혁이요, 철도와 관련된 구체적 결과물은 1894년 8월 20일 맺은 조일잠정합동조관(朝日暫定合同條款)이었다. 경복궁에서의 일본군 철수를 조건으로 맺은 이 조약의
주요 내용은 경부·경인 철도 부설권을 잠정적으로 일본에 양도한다는 것이었다. 1894년 10월, 청일전쟁이 한창인 시점에 일제는 센고쿠 미쓰구(仙石貢)라는 공학박사를 중심으로 한 10여 명의 측량반을 우리나라에 보내 병참사령부의 보호 아래 경부·경인 철도 부설을 위한 정밀 측량을 실시했다. 철도 건설을 일본의 국익을 위한 국책 사업으로 접근한 것이며, 1892년에 이은 두 번째 측량이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거칠 것이 없었다. 급기야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아관파천으로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긴 동안 일시적으로 주춤했으나 대한제국 선포 이후에도 그들의 한반도 지배 야욕은 수그러지지 않았다. 1898년 9월 8일, 경부철도합동이라는 이름의 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일잠정합동조관 이후 약 4년 만에, 최초의 철도인 경인철도 부설을 모스에게 허가한 지 3년 6개월 만에 한반도의 관문 부산에서 그 심장부 서울을 잇는 철도 부설권을 일본이 차지한 것이다. 이 시점은 이미 모스와 일본의 경인철도인수조합 간에 경인철도 부설권 양도·양수가 합의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일본은 두 철도의 부설권 모두 거머쥐게 된 것이다.

일부 국유지를 제외하고 민간 소유지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모두 사들인 다음 일본 철도 회사에 무상 임대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그런데 나라의 재정 형편상 그 많은 땅을 사들일 돈이 없었다. 더구나 일제는 철도건설을 이 나라의 경제력을 장악하기 위한 기회로 삼았기 때문에 철도가 지나는 주요 정거장 주변의 방대한 땅을 지정해 철도 부지로 요구했던 것이다.

완성된 경부선 철길

경부철도합동조약의 내용은 경인철도의 허가 조건과 비슷했다. 첫째, 선로와 정거장·공작물 등에 필요한 용지(땅)은 대한제국 정부가 무상으로 빌려준다. 둘째, 철도에 필요한 기계와 각종 물건을 외국으로부터 수입하는 것에 대한 관세 및 철도 용지와 관계된 지세를 면제하고, 철도 영업에 관한 각종 이익에는 징세하지 않는다. 셋째, 각 지방에 지선(支線)을 건설할 때 대한제국 정부와 국민이 건설하지 않는 한 외국 인민에게 허가하지 않는다. 군사적 압박에 의한 일방적 특혜 조약이었다. 일제는 실질적인 경부철도 부설권 확보 이후 두 차례 더 측량을 실시했다. 경부철도주식회사 창립 직전 예산 결정을 위한 측량이 한 차례 진행됐고, 1900년 3월 네 번째 측량이 실시됐다. 이와 함께 일본에서는 실제 부설을 위한 자본금 확보에 들어갔다. 경부철도주식회사 설립을 위한 발기 위원을 세우고, 의회에 경부철도 속성 건설을 위한 청원을 올려 1900년 1월 21에는 양원의 지지를 받아냈다. 이어서 ‘외국에 철도를 부설하는 제국 회사에 관한 법률안’이 통과됨으로써 자국 영토가 아닌 외국에 철도를 부설하는 데 대한 법적 근거까지 확보하게 되었다. 일본 정부의 보호와 지원 아래 자본금 2500만 엔인 회사를 설립하고, 주주 모집에 들어갔다. 주가는 주당 50엔으로 하고 1차로 10만 주를 목표로 삼았는데, 처음에는 실적이 시원치 않았다. 아무리 정부가 보증한다지만 해외에 철도를 부설하는 회사에 투자한다는 것은 지금도 쉽지 않은 일이다. 아니, 무모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해냈다. 1901년 3월 1차 모집 결과 20만9000주라는, 목표 대비 2배 이상 성과를 올린 것이다. 거기에는 비결이 따로 있었다. 투자에 따른 이익배당 약속이 아닌 애국심 덕분이었다. 즉 회사와 정부가 함께 나서서 한반도에서의 경부철도 건설이야말로 일본의 미래를 위한 애국 운동이라는 캠페인을 전개함으로써 너도나도 국민 주주가 되는 성과를 올린 것이다. 이렇게 일제는 한반도를 지배하기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해나갔다. 경부철도 건설과 관련해 우리 정부의 핵심 역할은 부지 제공이었는데, 서울~부산 간 400km가 넘는 거리의 노선 부지와 정거장 부지를 확보한다는 것이 대한제국 정부로서는 엄청난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일부 국유지를 제외하고 민간 소유지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모두 사들인 다음 일본 철도 회사에 무상 임대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그런데 나라의 재정 형편상 그 많은 땅을 사들일 돈이 없었다. 더구나 일제는 철도건설을 이 나라의 경제력을 장악하기 위한 기회로 삼았기 때문에 철도가 지나는 주요 정거장 주변의 방대한 땅을 지정해 철도 부지로 요구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 정부는 일본의 경부철도주식회사에서 돈을 빌려 민간의 땅을 산 다음 철도 회사에 그 땅을 무상으로 빌려주는 참으로 기막힌 상황이 벌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자본과 부지가 어느 정도 마련되자 1901년 8월 21일과 9월 21일 경부철도의 시발지인 영등포와 종착지인 초량에서 각각 기공식이 열렸다. 북부와 남부 양쪽에서 중앙을 향해 공사를 시작한 것이다. 1903년 12월 28일, 북부의 영등포~부강 간 51.5km와 남부의 초량~성현 간 53.1km가 개통되었다. 그리고 1904년 11월 10일, 서울 기점 205.06km 심천역 남방 지점에서 남북의 궤도가 서로 연결되었다. 경부선 철길이 온전히 이어진 것이다.

 

부산역, 경부선의 시종착역이 되다

1903년 일본 정부는 경부철도주식회사에 속성(速成) 공사 명령을 내린다. 일제가 민간 회사에 이런 명령을 내린 이유는 러일전쟁을 위한 준비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 많은 예산과 인력이 동원되었다. 영등포에서 초량까지 경부철도가 전선에 걸친 영업을 개시한 것은 1905년 1월 1일이었다. 당시 서울과 부산을 잇는 열차는 경성~초량 간을 약 30시간에 달리는 2왕복 열차가 있었다. 30시간이나 소요된 이유는 경부철도가 급히 건설되었기 때문에 궤도의 안전성이 떨어지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야간(심야) 운행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성역과 초량역 양 끝에서 오전과 오후 각각 한 대 열차가 출발했는데, 경성역에서 아침 일찍 출발한 남행 열차는 대구역까지, 오후에 출발한 열차는 대전역까지 운행한 후 다음 날 날이 밝으면 각각 대전역과 대구역을 출발해 초량역까지 운행했다. 반대로 초량역에서 경성역까지 운행하는 북행 열차는 아침에 출발한 경우 대전역까지, 오후에 출발한 경우 대구역까지 운행한 후 다음 날 경성역까지 운행하는 식이었다. 이렇게 하여 남행 열차는 약 29시간이 소요되었고, 북행 열차는 30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영업 개시 시점으로부터 4개월이 지난 1905년 5월 1일, 선로 개량을 마친 경부철도주식회사는 대대적 광고와 함께 직통 열차를 운행하기 시작했다. 남행 열차는 서대문역(구 경성역)을 오전 6시 30분에 출발해 초량역에 오후 8시 15분에 도착했으며, 북행 열차는 초량역을 오전 8시에 출발해 서대문역에 오후 9시 45분에 도착했다. 기존 30시간에서 13시간 45분으로 소요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인 것이다. 이런 직통은 하루에 1왕복만 운행했으며, 기존처럼 대전이나 대구에서 1박을 하는 방식의 여객열차가 2왕복, 서대문~성환 간 1왕복이 있었다. 경부철도에 급행 여객열차가 등장한 것은 군용 철도 경의선이 개통된 이후인 1906년 4월 16일의 일이다. 이 열차는 서대문역과 초량역을 11시간 만에 연결해주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08년 4월 1일, 간척 공사가 마무리되어 초량역 남쪽에 부산역이 들어섰다. 부산역이 경부선의 핵심 시종착역이 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