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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5월 24일, 같은 날 국가공무원으로 발령받은 우리 철도학교 동기들은 청량리역에서 기차를 타고 영주역으로 향했다. 역에서 멀지 않은 야트막한 언덕 위에 영주지방철도청 건물이 우뚝 서 있었는데, 그때는 그것이 얼마나 크게 보였는지 모른다.
인사 기록 카드를 작성하고 공무원으로서 의무와 책임을 다하겠다는 선서를 한 다음 임명장을 받았다.
그리고 각자의 근무지로 부임하기 위해 다시 기차에 올랐다. 태백선 영월을 지나 연하역에 도착하니 벌써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글과 사진 배은선 기자(수도권서부본부)

중앙선전통기념 철도승차증 앞면과 뒷면 (1942년 3월 30일 발행).

 

중앙선과의 인연

역무원 생활 13개월 만에 중앙선 제천조차장역 구내원(지금의 수송 담당 역무원)으로 발령이 났다. 우리나라에 두 곳뿐인 조차장 중에서 동양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는 제천조차장에 근무하게 된 것이다. 선로가 달랑 세 가닥뿐인 강원도 산골에 근무하다가 대지 14만 평에 50여 개 선로가 촘촘히 놓여 있고, 전용 입환기 네 대가 상·하선 남·북부에 상주하며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저마다 입환 작업에 분주한 역,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도착하는 상·하행 열차와 조성을 마치고 출발하는 열차들, 출·입고선을 오가는 다양한 기관차, 100명 넘는 직원들…. 그곳에 정이 들어 8년을 근무하는 동안 군 복무도 마치고 결혼도 했다. 결혼 이듬해에는 큰아들이 태어났다. 등용부역장 시험에 합격한 후 삼곡역으로 발령을 받았다. 보직은 운전원, 지금의 로컬 관제원이다. 당시 삼곡역은 영월, 제천, 단양을 잇는 우리나라 시멘트 생산의 핵심 트라이앵글에서 도담, 단양, 입석리, 쌍룡역과 함께 시멘트를 발송하는 중요한 역이었다.
이곳에서 운전 취급을 익힌 후 서울지방철도청으로 전출되었다. 그 후 부역장 발령을 받은 곳이 중앙선 신림역이었다. 아내, 두 아들과 함께 작은 철도관사에 살게 되었다. 텃밭이 딸려 있고, 뒤편으로는 삼봉산, 앞쪽으로는 맑은 개천이 흐르고 있었다. 우리는 봄이면 나물을 뜯고 산딸기를 따러 다니고, 개천에서 온갖 물고기를 잡아 어항에 키웠다.
꺽지, 쉬리, 칼납자루, 미유기, 갈겨니…. 가을엔 가을대로, 겨울엔 겨울대로 그곳의 산과 들은 놀이터이자 쉼터이며, 아낌없이 간식거리를 제공해주는 곳이었다. 지방청 근무를 마치고 첫 역장 발령을 받은 곳은 팔당역이었다. 훗날 등록문화재 제295호로 지정된 비좁은 곳이었지만, 시멘트 회사 사일로가 있어 업무량이 많았다. 그렇게 중앙선은 나를 진정한 철도인으로 단련시키고, 키워주고, 품어주었다.

중앙선은 경원선 청량리역에서 시작해 양평, 원주, 제천, 단양을 지나 죽령고개를 넘어간 후
영주, 안동, 의성, 영천을 지나 경주에 이르는 382.7km (2019년 기준 373.8km)의 노선이다.

중앙선(경경선) 건설 과정

중앙선은 경원선 청량리역에서 시작해 양평, 원주, 제천, 단양을 지나 죽령고개를 넘어간 후 영주, 안동, 의성, 영천을 지나 경주에 이르는 382.7km(2019년 기준 373.8km)의 노선이다. 1936년 5월 일본 제69회 의회에서 공사비 6,513만 엔을 투자해 1941년도 완성 예정으로 동의를 받았다. 당시에는 중앙선으로 공사를 시작했으나 1938년 12월 1일 영천~우보 간 첫 번째 영업 개시 때부터 경경선(京慶線)으로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이름을 바꾼 배경은 그해 5월 1일 시발역인 청량리역이 동경성역(東京城驛)으로 역명이 바뀐 것과 관련이 있다. 당시 일제가 중앙선을 건설한 주요 목적은 “동해중부선의 표준궤 개축과 함께 한반도 제2의 종관철도를 형성하고, 경북·충북·강원 및 경기의 4도에 걸친 오지 연선 일대의 풍부한 광산·농산 및 임산 등의 개발에 이바지해 지방 산업 발달을 촉진함”에 있었다. 또한 격증하고 있는 조선과 만주 간 교통 연락·객화의 수송 완화를 도모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중앙선을 부설하기 위한 노선 조사는 1923년 이후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던 중 1935년에 지금처럼 종관선으로 청량리와 영천을 잇는 계획이 수립됐다.
실측은 1936년 죽령 및 치악산의 긴 터널 부근에서 시작해 기타 여러 곳에서 동시에 착수하고, 같은 해 노반공사를 개시했다. 공사는 단양을 중심으로 남과 북으로 나누어 진행했는데, 청량리에서 단양까지가 북부선, 단양에서 영천까지가 남부선이었다. 영천에서 경주 구간의 경우 과거 대구에서 학산(포항 인근)에 이르는 762mm 협궤 조선철도주식회사 경동선의 일부로, 이미 1928년 국유화한 상태에서 표준궤로 바꾸는 공사를 신설 공사와 별개로 진행했다. 공사는 1936년 11월 3일 청량리~이패 간 제1공구의 노반공사를 시작으로 순차적으로 진행해 1939년 4월에는 양평까지 52.5km 구간이 개통되었으며, 이듬해 4월에는 원주, 1941년 7월에는 제천까지 총 155km가 순조롭게 개통됐다. 그러나 제천 이남 단양까지 약 36km의 공사는 1941년 3월까지 노반공사만 마친 채 궤도를 비롯한 자재 조달이 늦어져 공사가 지연되었다. 당시 사용한 레일은 미터당 37kg짜리였다.
경인철도 건설 과정에 한강철교라는 난공사 구간이 존재했던 것처럼, 중앙선 공사에는 치악산과 소백산이라는 난공사 구간이 있었다. 치악산을 극복하기 위해서 연장 3,650m에 이르는 치악터널과 연장 1,961m의 금대2터널이 뚫렸다. 치악터널은 직선터널로 길이가 4km에 가까워 ‘십리굴’이라는 별칭이 붙었고, 금대2터널은 ‘똬리굴’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리고 있다. 똬리라는 별칭은 루프식 터널의 특성상 기차가큰 고저 차를 극복하기 위해 산속에서 한 바퀴 돌기 때문에 얻은 이름이다. 지금도 이곳을 지날 때면 자신이 지나온 철길이 차창 밖으로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이는 체험을 할 수 있다.
금대2터널은 1939년 4월 20일, 치악터널은 동년 8월 1일에 각각 준공되었는데, 필자는 신림역 근무 시절 이터널 공사에 참여한 어르신을 만나뵌 적이 있다. 그분은 당시 건설 도급사인 니시모토 구미(西本組)에서 제작한 준공 앨범을 소장하고 계셨다. 그 앨범에는 공사 전후 전경 사진과 공사 과정, 공사 관계자, 공사 장비 등의 사진이 정성스럽게 담겨 있었다. 비록 그 어른은 당시 10대 후반의 어린 나이였지만 일반 노동자가 아닌 측량 기사 보조였기 때문에 그 앨범을 선물로 받을 수있었다고 한다. 그분의 증언에 따르면 터널 공사 시철근을 일체 사용하지 않았으며, 시멘트와 모래, 자갈의 비율을 엄격하게 지켜 배합했다고 한다. 자갈은 경기도 이천에서 많이 가져왔는데 불순물이나 흙이 들어가지 않도록 세 번이나 물에 씻었고, 누구라도 자재를 훔치거나 하면 사형으로 다스렸다고 하니 지독할 정도로 원칙에 충실한 공사였음을 알 수 있다.
치악산을 넘는 철길에는 이런 터널뿐 아니라 길아천철교라고 하는 볼거리가 또 있었다. 금교신호장과 치악역 사이에 있는 이 철교는 ‘백척교(百尺橋)’라고도 부르는데, 건설 당시 총연장 236m에 높이가 40m(현재는 35m)나 되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철도교로 널리 알려졌다. 1996년, 안전상의 문제로 그 옆에 새로운 철교가 놓이면서 기존 트러스 교각으로 만든 다리는 철거되어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남부선 공사는 남쪽 끝인 영천에서 분기부인 단양을 향해 북상하면서 이루어졌다. 영천을 출발해 안동, 영주를 거쳐 소백산 죽령고개에 이르러 당시 국내에서 가장 긴 연장 4,500m의 죽령터널을 뚫고, 금대2터널을 닮은 루프선형의 대강터널(연장 2,000m)을 빠져나오면 북부선과 연결되는 단양인 것이다.
1936년 12월 경북 안동에 안동건설사무소를 두어 남부선 건설을 주관하도록 하고, 본선을 19개 공구로 나누어 공사를 시작했다. 1938년 12월 영천에서 보까지 40km가 맨 처음 개통되고, 1940년 3월에는 경북 안동까지, 1941년 7월에는 영주까지 총 127.7km가 개통됐다. 단순히 궤도를 연결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구간별로 철도 운수 영업을 개시했다.
남부선의 난공사 구간은 남한강 철교와 죽령·대강 터널이었다. 그런데 이 공사를 가장 어렵게 만든 것은 당시의 시대 상황이었다. 일제는 1937년 중국을 침략한 이후 대륙 전체와 동남아로 확전을 계속하는 비상시국이었기 때문에 제아무리 철도 건설이 총독부의 중점 사업이라고 해도 물자를 조달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따라서 노반공사를 마쳐놓고 자재가 올 때까지 궤도 부설을 미뤄놓는 상황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1942년 1월 20일, 매서운 추위 속에 남한강 교량 공사가 마무리되었고, 2월 8일 단양역 구내에서 남부선과 북부선 궤도를 잇는 연결식이 거행되었다. 궤도 연결 후 역사 및 관사 설비, 통신 시설 등 만반의 설비를 끝내고 같은 해 4월 1일 경북 안동에서 야마다 철도국장이 참석한 가운데 경경선 전 구간 개통식이 열렸다. 1936년 11월 착공한 이래 1942년 4월 1일까지 5년 4개월 만에 전 구간을 개통한 것이다. 아울러 망우역과 경원선 연촌역을 이어주는 직결선이 함께 사용을 개시했는데, 연촌역이란 지금의 광운대역을 말한다.
1942년 6월 1일, 각각 남경성과 동경성으로 부르던 영등포역과 청량리역이 다시 제 이름을 찾았다. 그리고 경경선 역시 중앙선이라는 설계 당시의 이름을 되찾았다. 지금 단성역 구내에는 경경선전통기념비가 서 있는데, 옛 단양역 구내에 있던 비를 충주댐 건설로 역이 물에 잠기게 되자 옮겨온 것이다. 오랫동안 왜 이 기념비가 단양에 세워졌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건설 과정을 살펴보니 비로소 단양이 경경선 건설공사의 중심이자 절정임을 알게 되었다.

지금 우리에게 중앙선은 무엇인가?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둘이 되는 것이 산수(算數)지만, 마치 사랑하는 두 남녀가 만나 자녀를 낳듯 경부선과 중앙선은 한반도의 양대 축으로서 많은 결절을 만들고그 지역사회를 변화시켰다.
확장성만 놓고 본다면, 경부선이 경의선을 만나 압록강을 건넜듯 중앙선은 경원선과 함경선을 만나 두만강을 건너 대륙으로 이어졌다. 경부선과 마주 보며 뻗은 가지만 해도, 두 노선의 시발역인 청량리역과 서울역이 경원선을 통해 서로 만나고, 충북선을 통해 제천역과 조치원역이 만나며, 경북선을 통해 영주역과 김천역이 만난다.
그뿐인가. 영천역에서는 대구선을 통해 대구 땅과 만나고, 종착역인 경주역에서는 동해선을 통해 경부선의 종착인 부산역과 하나가 된다. 마치 씨줄과 날줄처럼, 사다리처럼 이어져 제1 간선에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막힘없이 우회할 수 있는 길을 터주는 것이 바로 제2 간선 중앙선의 미덕이다.
과거 중앙선은 영암선(현 영동선)과 연결되어 이 나라에 연료 혁명을 일으키기도 했고, 일찍이 전기철도가 도입되어 산업 역군 역할도 톡톡히 했다. 지금은 비록 퇴역 용사처럼 보일지 모르나, 모르는 소리!
중앙선이야말로 미래 시대가 요구하는 확장성과 유연성, 발전 가능성을 두루 갖춘 잠룡(潛龍)이 아닐까.

경부선과 마주 보며 뻗은 가지만 해도, 두 노선의 시발역인 청량리역과 서울역이 경원선을 통해
서로 만나고, 충북선을 통해 제천역과 조치원역이 만나며, 경북선을 통해 영주역과 김천역이 만난다.

그뿐인가. 영천역에서는 대구선을 통해 대구 땅과 만나고,
종착역인 경주역에서는 동해선을 통해 경부선의 종착인 부산역과 하나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