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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인 소나타

글 손민두 기자(광주본부) 일러스트 박경진

햇살을 받아 곱게 퍼진 윤슬이 작고 예쁜 꽃잎으로 바다 위에 떠있다.
하얀 천사의 눈물 같은 은방울 꽃, 요조숙녀 같은 각시 붓꽃, 은하수처럼 돋아난 쇠별꽃, 속빈 열매 가볍게 누르면 ‘꽈르르’ 터질 것 같은 꽈리꽃. 한겨울 바다가 난데없는 꽃잎으로 꽃바다가 되었다.
바람이 볼륨을 올린다. 바다 위의 꽃잎이 일제히 춤을 추며 생의 경이로움을 노래한다. 한데 이내 꽃잎이 꺾이고 찢기더니 비명을 지르며 산산조각으로 부서진다.
결국 바다는 한낱 바람의 날들이란 말일까.
바다는 생긴 것이 아니라 늘 여기 있었다.
바다 뒤에 바다, 그 뒤에 또 바다. 눈길 닿는 아득한 물마루까지, 수많은 사연을 품은 바다는 수수께끼처럼그 끝을 감추었다. 하지만 이 끝없이 넓은 바다에도 무수한 길이 나 있다. 길은 흘러 길과 만나고 또다시 두갈래 세 갈래로 나뉘어 사방의 바다로 퍼져 나간다.
바람의 선율을 타고 찾아온 꽃잎 같은 영혼과 바다의 길로 찾아든 바다. 그러자 잔바람이 일으키는 파도에도내 영혼은 보채고 울었다. 과연 이 슬픔의 끝은 어디일까.
나는 바다의 끝을 알지 못하듯 내 슬픔의 끝도 알지 못한다.
멀미약을 먹었음에도 출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작된 멀미 탓에, 나는 배에서 내리자마 선착장 끝으로 달려갔다. 그리곤 갈증에 목마른 사람이 물을 들이키듯 욕심껏 숨을 들이마셨다. 수면을 타고 날아온 냉한 바람이 허파꽈리에 닿자 한결 정신이 맑아졌다.
나는 바다의 향내를 더 깊게 맡으며 바람이 일으키는 파도에 눈을 떼지 못했다. 아니 뗄 수가 없었다.
섬을 향해 끝없이 달려오는 파도가 아득한 수평선 저 너머 환영 같은 꿈의 시간을 불러온다. 이별한 사람의 얼굴은 이별한 순간에 고정되는 것일까. 애써 외면하고 꼭꼭 숨겨야만 했던 과거 속에 머물던 그녀가 기억의 저편에서 스멀스멀 살아나 지금 내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이다.
갑자기 시간이 연속된 선이 아니라 흩어진 점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혼란스럽다. 그때는 엄마와, 지금은 딸과. 엄연히 다른 존재와 30년 시차를 두고 울릉도에 내렸지만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시간 배열은 나로 하여금 과거의 시간을 현재의 시간으로 바꾸고 있다.
아라가 아니라 윤희와 함께 배에서 내린 것처럼.
“이제 좀 진정 되셨어요?”
등 뒤에 인기척과 동시에 들려 온 아라의 목소리에 나는 얼른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순간, 아라 뒤에 배경으로 펼쳐진 섬의 풍경에 그만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아까 배에서 내리자마자 멀미에서 벗어나고픈 생각에 정신없이 바다를 향해 달려갔다. 그 때문에 온통 눈에 휩싸인 섬의 장관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이제 정신을 차리고 보니 겨우내 내린 눈이 눈부시게 아름답다.
온 섬을 두텁게 덮은 눈 더미는 마치 하얗게 빛나는
외투를 걸친 거인이 잔뜩 웅크리고 앉아있는 것처럼 압도적이다. 그러나 섬의 환상적 풍광에 더 이상 넋을 빼앗기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른 시선의 초점을 아라의 눈에 맞췄다.
“넌 괜찮았니.”
“저도 약간.”
아라는 아직도 내 물음에 간단한 답변과 꼭 필요한 질문만 하는 편이다. 사실 생물학적인 아버지일 뿐인 나로선 아라가 일면식도 없는 타인보다 훨씬 대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그러니 이에 대해 조금의 불만도 가질 필요가 없었다. 어쩌면 우리 둘은, 비록 부녀간이지만 나란히 뻗은 두 가닥 레일이 서로 만나지 않아야 목적지에 도달하는 평행의 원리를 따라야 했다. 때로 아라가 물러설 때 물러선 거리만큼만 다가서는 균형과 절제가 필요했다. 이것은 작곡에 있어 으뜸음과 딸림음의 간격을 일정하게 유지시켜 화음을 형성하는 이치와 같을 것이었다. 마치 레일이 곡선으로 구부러질 때 양쪽 레일이 같은 방향으로 똑같은 치수만큼 구부러져야하는 것처럼, 서로 노력하지 않으면 우리 사이는 언제든 어그러질 수있는 불안한 관계임이 분명했다. 다만, 나는 지금처럼 같은 곳을 바라보고 나란히 서 있는 시간을 자주 만들어그 사이 소리 없이 정이 깊어지기만 바라는 중이었다.
우리는 내 헌팅캡을 들썩거릴 만치 세차게 부는 바람을 뒤로하고 햇볕이 사방에 쌓인 눈에 부딪쳐 눈부시게 빛나는 섬 풍경을 바라보며 선착장을 걸어 나왔다.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었을 유수 같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전혀 낯선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나는 궁금했다.
“엄마가 이곳 울릉도를 떠난 날이 꼭 오늘 같았다고 하던데.”
아라가 이달 연주회 일정이 잡혔음에도 한사코이 겨울이 가기 전 이곳에 오고 싶다던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이 말을 듣고 보니 딸의 마음 씀이 여간 고마운 게 아니다. 하지만 심장이 예리한 칼에 찔린듯 어찌해 볼 수 없는 아픔이 몰려온다. 엄한 아버지에 의해 강제로 미국으로 떠났지만 어쩌면 편지 한 통없었을까? 그것은 아라가 5년 전 엄마의 편지를 손에 들고 나를 찾아오기 전까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빈틈없이 치밀했던 윤희의 아버지는 우체국장과 짜고 편지를 되돌아가게 만들었다. 편지가 내 손에 닿을 리 없었다. 생각할수록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세상을 뜨기 전까지 나를 향한 마음이 흩어지지 않았음을 알았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지금도 언제든 그녀에 대한 아름다운 상념에 추억의 손길을 뻗을 수 있는 것도 실은 그녀의 간절한 마음이 늦게나마 전달되었기 때문일 터였다. 나는 다시 아라의 손을 그 옛날 윤희의 손을 감싸듯 쥐고서 옛 기억을 찾아 바람의 바다를 향해 걸어갔다.

– 3월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