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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이 생긴다 – 도시가 발달하고 사람과 물자가 오간다.
일반적으로 역은 발전의 대명사로 여겨진다. 그래서 지역에 열차를 정차시키려는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개발의 광풍에서 벗어나 풍경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역도 있다.
자세히 보아야 눈에 들어오는, 열차도 잘 서지 않는 작은 역과그 둘레를 따라 쉬엄쉬엄 걷는 길.
화려한 관광지는 없지만 소박한 이야기와 담백한 볼거리가 마음을 붙잡는 그 길을 걸어보았다.

글과 사진 안수민 기자(수도권동부본부)

통근 열차를 추억하며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신탄리역. 지난해 4월 경원선 통근 열차가 끊긴 후 이곳은 섬처럼 남았다. 동두천에서 연천까지 복선 전철 공사가 한창이지만, 신탄리역은 개발의 변화에서 밀려났다. 옛 통근 열차 구간에는 임시 버스를 운행하고 있다. 동두천역에서 출발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사람들은 그대로일 텐데 통근 열차의 왁자지껄함은 없었다.
서로 소식을 묻고, 마주 앉은 이의 보따리를 넘겨보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신탄리역까지는 1시간 정도 걸렸다. 올겨울이 유난히 따뜻하다지만 북쪽답게 바람이 알싸했다. 집들도 낮은 지붕을 옹기종기 맞대고 겨울을 나고 있었다. 신탄리역은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는 문구로 알려진 곳이다. 2012년 백마고지역 개통으로 철도 종단점 타이틀을 양보하긴 했지만, 철마의 전진에 신탄리역도 흐뭇했을 거다. 맞이방은 썰렁했다.
열차 운행이 중지된 후 지자체 요청으로 역장만 주중에 근무하고 있다. 관리하는 이가 있어 역은 깔끔했다.
빈 승강장에는 직원들이 정성으로 가꾸었을 화단과 돌담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열차가 들어올 것같아 아무리 철길 너머를 바라봐도, 반년 넘게 열차가 오가지 않은 선로는 먼지마저 고요했다.

옛 경원선의 시간을 따라
역 앞 슈퍼는 본래 이름 대신 역전(驛前) 슈퍼로 통한다. 신탄리역 출신은 다 아는 터줏대감이다.
가끔 유통기한이 임박한 부식거리를 역에 기부(?)하기도 했다고. 슈퍼 옆 매운탕집엔 수북한 나물과 ‘역전우동’ 이라고 쓴 종이가 붙어 있었다. 공통분모를 찾기 힘든 조합이 되레 정겨웠다. 길가엔 분홍빛 네온사인을 밝힌 다방과 녹슨 철 대문의 여인숙이 있었다. 외지인으로 존재가 확인되는 업종이기 때문일까, 인적이 뜸한 다방과 여인숙은 빈집처럼 쓸쓸했다. 역 뒤편에는 고대산이 자리한다. 일제강점기 의병과 일본군이 치열한 교전을 벌인 이곳은 등산으로 북쪽 땅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장소라고 한다. 지금은 역사적 의미보다 트레킹 코스로더 알려져 있지만 아무려면 어떠랴. 갈색 산등성은 봄이 오기 전에 좀 더 쉬어야겠다는 듯 얌전히 엎드려 있었다. 폐터널 역(逆)고드름은 그야말로 진귀한 풍경이다. 오래전 악마의 이빨처럼 땅에서 올라오던 고드름을 본기억이 강렬해 다시 가보았다. 당시엔 안내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는데 지금은 ‘평화누리길’(3.8km)로 지정되고, 부정확하던 표지판도 정비되어 있었다. 빈 들판을 따라 한참 걸으니 예전과 달리 넓은 주차장이 나타났다. 정말 폐터널 같던 입구는 나무 계단과 안내판이 생겨 제법 관광지다워졌고, 무시무시하던 고드름도 따뜻한 기온 탓에 귀엽게 돋아 있었다. 예전만큼의 포스는 없었지만 그새 입소문이 났는지 잠시 머문 동안에도 방문객이 끊이지 않았다. 원래 이 터널은 일제강점기에 용산과 원산을 잇기 위해 건설했다. 도중에 일본의 패망으로 공사가 중단되고 한국전쟁 때 북한군이 탄약 창고로 사용했다. 역고드름의 과학적 근거는 차치하고라도 원치 않게 여러 번 용도가 바뀐 터널엔 주변국에 치이며 살아온 우리의 신산한 역사가 녹아 있는 듯했다. 멀지 않은 곳에옛 경원선 교량이 남아 있다. 1910년대에 건설되었고 한국전쟁 때 파괴되었다고 한다. 무심히 이용하던 경원선의 기나긴 역사가 새삼스러웠다. 연천과 철원 지역에서 많이 나는 현무암을 사용한 게 특징인데, 차곡차곡 쌓은 돌이 마치 성채의 일부 같았다. 교각을 기준으로 이쪽은 경기도 연천, 저쪽은 강원도 철원이다. 비록 열차는 오가지 못하지만 여전히 지역과 지역, 과거와 현재를 잇고 있으니 교량의 역할은 충분히 하고 있는 셈이었다.

다시, 철마는 달리고 싶다
신탄리역 주변에서 가장 유명한 먹거리는 더덕오리구이다. 조용한 동네에서 가장 시끌벅적한 곳이다. 얼마 전 새끼를 낳았다는 고양이가 느릿느릿 들어서자 꺼리는 이 없이 수고했다고 한마디씩 건넨다. 오리 한 마리면 4명이 먹어도 충분하다. 채소로 눈속임하지 않은 고기양이 실하다. 밑반찬으로 나오는 나물도 맛깔스럽다. 추가로 요청하면 즉석에서 쓱쓱 무쳐준다. 서비스로 주는 오리탕에 툭툭 떠 넣은 수제비까지 건져 먹고 나면 배 속이 뜨뜻한 완벽한 식사다. 저녁 6시가 조금 넘은 시각, 벌써 마을은 하루를 정리하고 있었다. 지붕 위로 어슴푸레 어둠이 내려앉고 이따금 개짖는 소리가 들렸다. 어두운 골목 끝, 불 꺼진 신탄리역이 보였다. 오랜 시간 철마의 꿈을 품어주던 신탄리역, 이젠 자신만의 꿈을 꿀 차례다. 땡땡땡! 멀리서 건널목 차단기 소리가 울리고 철마가 다시 힘차게 신탄리역으로 들어서는 꿈을. 그런 날이 오면 이작은 마을도 사람들의 온기와 웃음으로 가득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