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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부선 밀양역(密陽驛) 구내에는 언제나 청청한 이파리를 자랑하며 꼿꼿하게 서 있는 대나무가 오가는 길손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산자락 된비알 아래 자리 잡은 대나무는 뿌리줄기로 번식을 하는 까닭에 병풍처럼 들어서서 어느새 숲을 이뤘다.

글과 사진 김응기 기자(수도권동부본부)

대나무는 나무가 아니다?

대나무는 이름과 달리 나무가 아니다. 볏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이다. 나무는 수피 안쪽에 부름켜(형성층)라는 세포분열 조직층이 있어 세포분열을
통해 해마다 줄기가 굵어지는 비대성장(肥大成長)을 하는데, 대나무는 부름켜가 퇴화되어 비대성장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나무는 나무의 속성도 가지고 있다. 풀이라고 보기에는 사철 푸른 데다 너무 크고 단단하다. 게다가 오래 산다. 그런 까닭에 일찍이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는 ‘오우가(五友歌)’에서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뉘가 시켰으며 속은 어이 비었는가…”라고 노래했다.
대나무의 생장은 첫 한 해에 모두 결정될 만큼 그 속도가 무척 빠르다. ‘우후죽순(雨後竹筍)’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종류에 따라 하루에 최고 60~100cm까지 자란다. 그래서 죽순이 자랄 무렵 대밭에 들어가 죽순 위에 모자를 벗어놓고 용변을 보다가는 낭패 보기 십상이라는 말도 생겼다.

유구한 역사 속에서 만나는 대나무

대나무에 대한 기록은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만큼 역사가 아주 깊다. 고려 후기의 고승 일연(一然)이 지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미추왕과 죽엽군(竹葉軍) 설화를 비롯해 신문왕 때의 신기한 피리 이야기인 만파식적(萬波息笛) 설화와 의상대사가 창건한 양양 낙산사(洛山寺) 연기설화(緣起說話)가 실려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만파식적 설화는 김부식(金富軾)이 지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도 복수로 실려 있다. 대나무는 예로부터 우리 일상생활에 다양하게 활용되었다. 고대사회에는 주로 활과 화살, 창 등 전쟁 무기의 재료로 이용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는 종이가 발명되기 이전에 죽간(竹簡)이라고 해서 대나무 조각에 문자를 기록하기도 했다. 대나무는 오동나무와 더불어 부모상에 짚는 지팡이로도 쓰였다. 우리 선조들은 부상(父喪)에 대나무로 만든 지팡이인 저장(苴杖)을 짚었다. 대나무는 안팎이 둥글어서 하늘을 상징한다고 여겼다. 또한 하늘은 아버지를 상징하기도 해서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것을 하늘이 무너진다는 의미로 천붕(天崩)이라고 했다. 이런 연유로 윗사람들은 어린아이들이 함부로 대나무 지팡이를 갖고 노는 것을 경계했다.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놀다가 넘어지면 아버지가 돌아가신다고 믿었다. 반면에 모상(母喪)에는 오동나무로 만든 지팡이인 삭장(削杖)을 짚었다. 오동나무는 속에 마디가 있어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속 깊은 어머니의 자애를 상징한다고 여겼다.
대나무는 속이 비어 있고 길게 쪼개지는 성질이 있어 바구니, 돗자리, 어구(漁具) 등 다양한 생활용품을 만드는 데 사용했다. 또한 대금이나 단소, 퉁소, 피리 등 악기를 비롯해 붓대나 담뱃대, 낚싯대 등을 만드는 데도 쓰였다. 이 외에도 댓잎으로는 술을 빚기도 했고, 죽순은 요리 재료로 쓰였다.

대나무 특성에 담긴 군자의 인격

우리 선조들은 대나무를 통해 여러 가지 교훈을 얻었다. 사시사철 푸르고 곧게 자라는 대나무의 품성을 보고 지사(志士)의 매서운 절조(節操)를 떠올리며 칭송했다. 쪼개질지언정 휘어지지 않아 성품이 곧고 강직한 사람을 일컬어 ‘대쪽 같다’고도 했다. 그래서 여말선초의 문인이자 지사인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 선생은 대나무의 이러한 특성을 간파해 다음과 같은 유명한 시조 작품을 남겼다.

눈 맞아 휘어진 대를 뉘라서 굽다턴고
굽을 절(節)이면 눈 속에 푸를쏘냐
아마도 세한고절(歲寒孤節)은 너뿐인가 하노라

밀양역

경상남도 밀양시 중앙로에 있는 밀양역은 1905년 1월에 경부선 개통과 더불어 영업을 시작했다. 지금의 역사는 1982년에 신축했다. 밀양역은 그동안 공간이 협소하고 건물이 낡아 이용객이 불편을 겪었다. 하지만 올해부터 ‘밀양역사 재건축’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됨에 따라 오는 2022년에는 지금의 자리에 새로운 역사가 들어설 예정이다. 

밀양역은 승강장에서 바라보는 역 구내 풍경이 무척 인상적이다. 일부이기는 하지만 구내 선로 변에 바위 절벽이 늘어서 있는 데다 절벽 아래에 대나무가 숲을 이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대나무 숲은 요즘같이 무채색 일색인 추운 계절에 초록의 진가를 발하며 오가는 길손에게 싱그러운 눈맛을 선사하고 있다. 세한삼우(歲寒三友)의 하나로 칭송한 옛사람들의 견해를 증명이라도 하듯 존재감을 과시하며 이름값을 톡톡히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