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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만 듣던 호남선, 수업 시간에만 듣던 고막원역이며 영산포역을 직접 가보게 된 것은 임용 후 11년이 지난 1994년이었다. 오랜 영주지방청 근무 끝에 연고지인 서철(서울지방철도청)로 발령이 났는데, 그 첫 임지가 서울열차사무소였다. 전국의 주요 노선은 대부분 역명을 외우고 있었지만, 머릿속에만 있던 역이 실상이 되어 두 눈에 나타났을 때의 놀라움이란…. 물론 급행이 정차하지 않는 작은 역들은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곤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모퉁이, 때로는 긴 터널을 지나, 혹은 드넓은 평야 지대에 다소곳이 자리 잡은 아담한 역들은 나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글과 사진 배은선 기자(수도권서부본부)

호남철도주식회사의 시작

우리나라에서 호남선 철도 건설이 처음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외세에 의해서였다. 그중에서도 프랑스가 가장 적극적이었다. 1896년 프랑스 피브릴 회사는 주한 조선 프랑스 공사를 통해 경의·경원선과 경목선(호남선) 철도 부설권을 외무대신에게 청구했다. 우리 정부는 1896년 6월 호남 철도 자력 건설을 결의하고, 10월 16일 자로 이완용 외무대신은 프랑스 측에 이 철도 부설권의 허가 불허를 통보했다. 일본은 1898년 경부 철도 부설권을 확보한 후 호남선에도 눈독을 들여 목포에 측량 기사를 보냈다. 그때부터 이미 경부선과 호남선 그리고 그 둘을 잇는 경전선까지 구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정부는 자력 건설 의지를 다시 피력하고 1904년 5월 호남철도주식회사를 세웠다. 철도원 총재 신기선이 주선하고 궁내부 고문 이윤용이 사장을 맡은, 이른바 관제 회사였다. 총사무장은 서오순으로, 그는 1900년 12월 국내철도운수회사 대표로서 사립 철도 학교인 ‘국내철도운수회사양성학교’를 설립한 인물이기도 하다.

호남철도주식회사는 1904년 6월 8일 호남 철도 부설권을 확보하고 선로 답사에 나섰다. 또 11월부터는 일부 토공사까지 시작했다. 호남철도주식회사의 부설 허가에 대해 처음부터 극력 반대 의사를 표하던 일제는 을사늑약 이후 식물 정부가 된 대한제국을 압박해 철도 부설 허가를 취소하도록 했고, 결국 1909년 5월 회사는 보상액을 받고 철도 부설을 포기해야 했다.이 당시 일제는 이미 조치원에서 목포, 군산에서 목포, 군산에서 조치원에 이르는 구체적인 선로 답사와 측량을 마친 상태였다. 일제에 의한 호남선 부설 공사는 1910년 1월 시작했는데, 대전에서 분기해 가수원, 두계를 거쳐 논산과 강경평야를 지나고 이리와 김제평야, 노령산맥을 지나 송정리, 나주, 목포에 이르는 노선이었다. 이리에서 분기해 군산항에 이르는 지선(군산선)을 합치면 모두 282.6km에 달했다. 부분 개통과 함께 영업을 개시했는데, 1911년 7월 11일 대전~연산 구간을 시작으로 1913년 5월 15일 학교~목포 구간이 개통하고, 마지막으로 1914년 1월 11일 정읍~송정리 구간이 이어지면서 전선 개통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대전에서 호남선으로 나뉘는 분기점이 대전 남부가 아닌 북부에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서울에서 내려온 열차가 대전에서 호남선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동력차를 돌려 붙여야 진입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바로 이 문제 때문에 경성에서 목포를 잇는 첫 직통 여객열차가 설정된 1933년 이후 대전조차장역이 생긴 1978년 1월 1일 이전까지 모든 하행 열차는 대전역에 일단 들어와 입환 작업을 거쳐야 했다. 이것을 배경으로 탄생한 것이 그 유명한 대전역의 가락국수와 노래 ‘대전 블루스’다. 일제가 호남선 분기부를 남쪽이 아닌 북쪽으로 삼은 이유에 대한 나의 판단은 이렇다. 지금 우리나라 철도의 중심은 단연 서울이다. 서울을 중심으로 상행과 하행을 나누고, 여객열차의 호차 번호를 매긴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본토와 가까운 부산이 중심이었다. 대전역의 호남선 분기는 서울에서 접근할 때에는 불편하지만, 부산에서 접근할 때에는 편리한 구조인 것이다. 핵심적으로, 호남선 자체가 충남과 호남의 비옥한 평야 지대에서 나오는 농산물을 종착역인 군산과 목포를 통해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 만들었기 때문에 대전에서의 입환 문제는 큰 고려 대상이 될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호남철도주식회사의 부설 허가에 대해 처음부터 극력 반대 의사를 표하던 일제는 을사늑약 이후 식물 정부가 된 대한제국을 압박해 철도 부설 허가를 취소하도록 했고, 결국 1909년 5월 회사는 보상액을 받고 철도 부설을 포기해야 했다.
이 당시 일제는 이미 조치원에서 목포, 군산에서 목포, 군산에서 조치원에 이르는 구체적인 선로 답사와 측량을 마친 상태였다.

호남선 열차 운행

호남선은 경인 철도나 경부 철도와 마찬가지로 전체 노선을 여러 차례 나누어 개통했다. 구간별로 개통했을 때 운행한 열차는 대부분 혼합열차를 시·종착역 간에 2왕복 운행하는 방식이었다. 혼합열차란 여객열차와 화물열차를 합친 개념으로, 여객열차가 중심이 되어 화차를 연결하면 혼합열차이고, 화물열차가 중심이 되어 객차를 연결하면 객급화물열차다. 물론 열차 계급상 혼합열차는 객급화물열차나 화물열차보다 상위에 있었다. 혼합열차는 기본적인 여객 취급 시간 외에 화물 취급을 위한 시간을 더해 열차 운행 시간표를 만들었기 때문에 표정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여객열차가 아닌 혼합열차를 편성한 이유는 건설 초기에는 순수 여객 수송 수요가 많지 않고, 계속 진행되고 있는 철도 건설 자재 수송을 위해 화물열차가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1914년 호남선이 전선 개통하면서 대전과 목포를 잇는 순수한 여객열차가 운행을 시작했다. 초기엔 1왕복이었으며, 소요 시간은 9시간 30분 정도 걸렸다. 또 정읍을 중심으로 양분되어 대전~정읍 간 2왕복, 정읍~목포 간 1왕복의 혼합열차를 운행했다. 개통 이후 4년 6개월이 지난 1918년 7월 열차 운행 다이어를 개정하면서 호남선을 이리와 송정리로 구분하기 시작했다. 대전~목포 간 여객열차는 소요 시간이 1시간 당겨져 8시간 30분 소요됐으며, 대전~이리 간 혼합열차 1왕복, 이리~송정리 간 객급화물열차 1왕복, 송정리~목포 간 혼합열차가 1왕복했다. 열차 운행 분기점이 정읍에서 이리와 송정리로 바뀐 이유는 전북경편철도주식회사가 국철 이리역과 전북도청 소재지인 전주를 잇는 762mm 협궤 노선(훗날 전라선)을 부설해 이미 1914년 12월 1일부터 영업을 함으로써 이리역이 호남선의 주요 교통 중심지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송정리역의 경우 비록 남조선철도주식회사에 의해 광주를 잇는 15km 남짓 되는 철길이 완성된 것은 1922년이지만, 1913년부터 철도 부설 시도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남도의 주요 교통 결절점으로 일찌감치 인정받고 있었다. 1922년 5월 들어 대전~목포 간 1왕복이던 여객열차가 1왕복 추가되었다. 또한 소요 시간이 1시간 더 단축돼 7시간 30분이 되었다. 2년 후인 1924년 5월부터는 기존의 여객열차 2왕복 외에 대전과 목포를 잇는 혼합열차가 2왕복 증설되었다. 이 당시 여객열차의 소요 시간은 6시간 30분 내외였으며, 혼합열차는 10시간 30분 내외였다. 1926년이 되자 경성~목포 간 직통객차가 신설되었다.

직통열차도 아니고 직통객차란 무엇일까? 직통객차란 시발역에서 종착역까지 일관되게 운행하지 않고 분기역까지 운행한 후 다른 열차에 편성돼서 운행하는 경우를 말한다. 직통객차 편성 이전에는 호남선 이용 고객은 대전까지 경부선을 타고 내려온 후 호남선 표를 새로 끊어 열차를 이용해야 했다. 하지만 직통객차를 운행하면서 시발역에서 도착역까지 한 번에 표를 끊을 수 있게 되었고, 대전역에서 열차를 갈아탈 필요 없이 기다리고 있으면 호남선 열차에 연결해 도착역까지 갈 수 있었다. 즉 호남선 방면 손님의 경우 호차를 지정해 표를 발매한 후 대전역에서 객차를 해방해 호남선 열차에 연결하는 방법을 썼던 것이다. 이런 운영 방법은 태백선 야간 여객열차에 정선선 객차를 연결해 운행하는 등 1980년대 이후에도 많이 활용했다. 이 당시 경성에서 대전까지 소요 시간은 급행열차의 경우 3시간 40분에서 4시간 20분 정도였다. 그러니까 경성에서 목포까지는 대전역에서의 입환과 접속을 위한 대기 시간을 고려할 때 15시간 가까이 소요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경성에서 목포까지의 호남선 직통 여객열차가 최초로 설정된 것은 1933년 4월 1일이다. 호남선 전선 개통 이후 19년 만에야 직통열차가 투입될 정도로 수송 수요가 많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열차는 밤 10시 50분에 경성을 출발해 대전에 새벽 3시 45분 도착, 기관차를 돌려 붙인 후 새벽 4시 10분에 출발, 목포역에 오전 9시 50분에 도착했다. 정확히 11시간 만에 서울에서 목포를 이어준 것이다. 이듬해인 1935년에는 경성~목포 간 직통 여객열차 1왕복 외에 대전~목포 간 여객열차 2왕복, 광주~목포 간 여객열차 1왕복, 대전~이리 간 동차 2왕복, 영산포~담양 간 동차 1왕복, 이리~정읍 간 혼합열차 1왕복을 운행했다. 한편 이리~전주 사설 철도 협궤 구간은 1925년에 이미 1일 6왕복하는 열차가 운행될 정도로 이용객이 많았다. 이 구간은 1927년 국가가 사들여 국유철도에 편입시킨 후 1435mm 표준궤로 개량했다. 송정리에서 광주를 잇는 남조선철도주식회사의 협궤 노선은 1923년 9월 1일 조선철도주식회사에 합병된 후 1928년 1월 1일 국유철도에 편입되었다.

 

호남선이 지닌 의미

호남선과 경원 철도가 부설됨으로써 한반도를 동남으로부터 서북으로 종관하는 경부·경의선 철도와 함께 한반도를 X자형으로 종관하는 간선 철도가 기틀을 잡게 되었다. 경부선과 경의선이 일본과 대륙을 연결하는 통로로서 한반도를 종관하는 역할이 강했던 반면, 호남선의 경우 지역의 물자를 끌어 모아 일본으로 보내주는 수탈 통로 기능이 강했다. 광복 이후 경부축은 경제성장의 중심축으로서 활력을 띠게 되었으나 호남축은 상대적으로 대규모 산업 발전과 일정 거리를 두게 되면서 철도 복선화도 늦어져 2003년 12월에야 공사가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2004년 4월 1일 호남선에 고속열차 운행이 개시되고, 더구나 호남고속철도가 광주 송정까지 시원하게 뚫리면서 철도를 이용한 호남 지역 관광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관광의 흐름이 무조건 외국으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숨은 보물을 찾듯 잘 알려지지 않은 국내 여행지를 찾아가는 콘셉트로 바뀌어가면서, 호남선은 웰빙의 상징이자 아름다운 다도해 서남 해안권으로 들어서는 길목으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호남고속철도가 광주 송정까지 시원하게 뚫리면서 철도를 이용한 호남 지역 관광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관광의 흐름이 무조건 외국으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숨은 보물을 찾듯 잘 알려지지 않은 국내 여행지를 찾아가는 콘셉트로 바뀌어가면서 호남선은 웰빙의 상징이자 아름다운 다도해 서남 해안권으로 들어서는 길목으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