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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인 소나타

글 손민두 기자(광주본부) 일러스트 박경진

아라의 영혼은 광대무변한 우주 어딘가에서 왔을 것이다. 어떻게 왔을까. 수면 위를 날아오는 바람을 타고? 물 위에 뜬 별에 실려? 마른 흙을 일으키는 빗방울에 포집돼? 솜털에 싸인 풀씨 속에 숨어서? 세상엔 발아하지 못한 씨앗이 무수히 많다. 아라는 녹은 물방울이 눈밭에 스미듯 순순히 세상에 오지 못했다. 뭉크의 절규 속을 하염없이 헤매다 핏빛 엘레지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슬픈 운명이었다.

아라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지금부터 10년 전이었다. 그 즈음, 나는 작곡을 잠시 멈추고 방송진행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어느 날, 오윤희의 어머니가 뜻밖에 나를 찾아왔다. 그런데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는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나와 윤희 사이에 딸이 있다는 거였다. 세상에, 이럴 수가. 순간, 나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조금 후에 정신을 가다듬자, 그녀는 윤희가 나와 헤어진 후 일어난 일을 소상히 말해 주었다. 아버지에 의해 미국에 강제유학을 떠난 윤희는 이듬해 딸을 낳았다. 아이의 이름은 바다의 순 우리말에서 따온 ‘아라’였다. 윤희는 아라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뜻하지 않은 총기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부모는 아라를 한국으로 데려와 본인들 호적에 올리고 키웠다. 그런데 아라가 줄리어드, 커티스와 함께 미국의 3대 음악대학으로 꼽히는 ‘피바디 음대’에 진학하게 되었다고 했다. 윤희의 어머니는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나를 찾아왔다.

그녀는 결코 아라를 만나서는 안 되며, 멀리서만 바라보라고 신신당부하고 갔다. 아쉬웠지만 그녀의 뜻을 거역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천지간에 내 혈육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이루 말할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아라는 피바디 음대 재학 중 폴란드에서 열린 쇼팽 콩쿠르 피아노 부분에서 1등에 입상했다. 그 콩쿠르는 워낙 세계적인 실력자들이 경쟁하는 무대여서 그녀는 국내 언론의 대대적인 조명을 받았다. 그녀의 연주 실황이 공영방송에 방영되고, 며칠 동안 각 신문의 문화면은 그녀의 커다란 사진으로 채워졌다. 그런데 혹시나 우려했던 일이 터지고 말았다. 평소 호형호제하며 친하게 지내던 한 일간지 기자가 나와 아라의 관계를 부녀간라고 특종으로 보도해 버렸다.

‘오아라와 이현우는 부녀 사이’

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제목을 달고 인터넷을 통해 퍼진 뉴스는 삽시간에 많이 본 뉴스 1위에 올랐다. 한동안 실시간 검색어 선두에 오르고 수많은 댓글이 달렸다. 이 사건은 비록 어린 아라에게 커다란 상처와 혼란을 안겨주었겠지만, 언젠가는 벌어질 부녀간의 상봉을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왁자지껄한 선착장을 빠져나와 항구와 가까운 곳에 잡아둔 숙소에 짐을 풀고 나왔다. 해가 지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 나는 어디부터 구경하면 좋을까 궁리하면서 잠시 서성거렸다. 찬 바닷바람이 매섭게 불어온다. 한겨울인데도 이파리가 풍성한 상록수 가지들이 심하게 흔들린다. 저 멀리 바다를 옆으로 끼고 구불구불 이어진 산책로에 사람들이 늘어섰다. 옛날 윤희와 함께 틈만 나면 걸었던 그 길이다.

“우리 저 길 걷자.”

물가로 나오자 바람이 더 변화무쌍하다. 불어오는 방향이 시시각각 바뀌고 내 몸을 빙빙 휘감으며 소용돌이친다. 바람을 따라 일어난 파도는 쉴 새 없이 구멍이 숭숭 뚫린 암벽을 때린다. 그런데 가만히 귀 기울여 보니, 바람과 파도가 음(音)의 영역에서 절묘한 하모니를 이룬다. 외려 종잡을 수 없는 바람이 허공을 베면서 다양한 음정을 만들고, 이것이 암벽을 친 파도의 경쾌한 파괴음과 만나 화음이 배어 나온다. 때로 불협화음을 이루면서도, 어느새 한 가락으로 조율되는 과정을 반복하며 화성적 진행이 이루어진다. 나는 작곡을 위해 재빨리 머릿속 오선지에 음표를 그려 넣으며 악상을 가다듬었다.

“할아버지는 엄마가 이 섬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알고 찾아왔을까요?”
아라의 질문이 바람과 파도 소리에 묻혀 희미하게 들린다.
“이 섬 농협에서 예금을 찾았는데, 그 정보를 입수했단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어요.”
“예나 지금이나 돈 많고 빽 있는 사람이 하지 못할 게 뭐가 있겠니? 그땐 지금처럼 개인정보보호가 되는 세상도 아니었고.”
나는 장갑 낀 손등으로 코를 문지르며 말끝을 흐렸다.

사실, 사람이 특정할 수 있는 몇 가지 원인을 고치거나 없앤다고 해서 그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 벌어질 일은 반드시 벌어지게 마련이다. 윤희의 아버지가 나의 금융거래 정보를 빼내 여길 찾아온 것도 마찬가지다. 설사 그것을 하지 않았다 해도 그는 무슨 수를 쓰든 찾아왔을 것이다. 장래가 유망한 부잣집 딸이 가난뱅이 청년과 눈이 맞아 종적을 감췄는데 가만있을 아버지는 세상에 없다. 나와 윤희의 이별은 반드시 벌어지게 될 일 중 하나였을 뿐, 그건 운명이 아니었다.

 

– 4월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