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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캘리그래피 지용태(한국철도공사)

봄꽃 향기는 바람에 날리지만
친구의 향기는 오래도록 내 마음에 날려왔다.

35년 전 영주지방철도청 태백선 연당역* 역무원으로 첫 발령을 받았다. 2월의 칼바람이 유난히도 추운 날이었다. 영주에서 발령장을 받아 들고 제천에서 출발하는 새벽 첫차를 탔다. 첫 근무지인 연당역에 내려 바라본 풍경은 어스름한 추위에 꺼질 듯이 위태로운 승강장 외등이었다. 더없이 쓸쓸하고 힘들어 보이면서도 왠지 낭만이 있어 보였다.

아버지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이는 부역장이 반갑다며 난로 위 노란 양은 주전자에서 김이 풀풀 나는 보리차를 따라주셨다. 날이 밝은 다음에 돌아본 연당역은 눈이 내려 희게 보였지만 실상 눈 밑에는 무연탄이 언덕처럼 가득 쌓여 있었다. 당연하게도 연당역 앞 도랑에는 검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렇게 내 첫 직장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나마 난 나은 편이었다. 내 친구 녀석은 청령포신호장에 내렸는데 민가가 하나도 없는 그야말로 적막강산이라 사나운 들짐승이 뛰쳐나올 것 같아 무서워서 다리가 후들거렸단다. 다행히 근무자 한 분이 맞아주셨고, 친구 또한 같은 지역에서 그렇게 직장 생활이 시작되었다.

낯선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지내려니 두려운 마음도 들었지만 친구가 옆에 있어 여간 든든한 것이 아니었다. 한집에서 하숙을 하면서 우리 둘 사이는 더 두터워졌다. 퇴근 후에는 함께 들로 강으로 놀러 다니고 근무 중에는 역 간 폐색 전화기로 수다도 떨고….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흡사 연인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내 얘기를 편히 들어주고 자신의 아픔도 스스럼없이 얘기하는 친구에겐 향기가 났다. 남자의 향기도 아니고 꽃향기도 아닌 나만이 느낄 수 있는 독특한 향기가 있었다. 생각해보니 친구의 마음에는 향기 저장 창고 기능이 있었나 보다.

내가 먼저 군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휴가 때 친구 방에 가보면 서툴게 쓴 나의 편지를 서랍에 보관해놓은 것을 볼 수 있었다. 그건 향기로운 마음이었다. 봄꽃 향기는 바람에 날리지만 친구의 향기는 오래도록 내 마음에 날아왔다. 그 향기는 외로울 땐 위로로, 힘이 들 땐 격려로, 기쁠 땐 환한 웃음으로 다가왔다.
친구에게 향기가 있다는 걸 말해본 적은 없는데, 친구는 자신의 향기를 알고 있을까? 퇴직을 몇 년 앞둔 오늘, 나 또한 마음속 깊이 꽁꽁 숨겨두었던 나의 향기를 꺼내서 친구에게 날려 보내고 싶다.

“친구야, 긴 시간 동안 곁에 있어주어 고맙네. 남은 여행길에도 함께할 거지? 꽃피는 봄이 오면 검은 도랑물이 흐르던 연당역 앞에서 막걸리나 한잔하세.”

 

* 연당역은 태백선에 속한 역으로 수도권 연탄 생산에 필요한 무연탄과 광산에 필요한 갱목, 그리고 철강 제련용 석회석을 실어 나르던, 작아도 나름대로 알찬 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