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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선 신기역(新基驛) 구내 건널목에는 아치를 이룬
등나무 덩굴이 오가는 길손을 맞고 있다. 등나무 덩굴은 짙푸른 잎을 잔뜩 매단 채
한여름 뙤약볕을 피할 수 있도록 시원하게 그늘을 드리웠다.

글과 사진 김응기 기자(수도권동부본부)

등에 얽힌 이야기

등은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덩굴성 나무로, 흔히 등나무라 부른다. 하지만 국가표준식물목록에서 추천하는 이름은 ‘등(藤)’이다. 등은 다른 나무의 도움 없이는 스스로 곧게 자라지 못한다. 그런데도 오히려 의지하던 나무를 못살게 굴다가 결국 죽게 만든다. 따라서 우리 선조들은 이러한 등을 배은망덕한 소인배에 비유해 못마땅하게 여겼다. 조선 중종 때의 문신 이언적(李彦迪)은 간사한 사람을 등나무에 비유해 경멸했고, 인조 때 문신 김익희(金益熙) 역시 남에게 빌붙어 사는 등나무를 소인배에 비유해 비하했다. 등은 콩과의 넝쿨식물(덩굴식물)로 오른쪽으로 감고 올라가려는 성질이 있다. 반면 같은 콩과의 넝쿨식물인 칡은 왼쪽으로 감고 올라간다. 그러다 보니 등과 칡이 만나면 서로 먼저 감고 올라가려고 한데 엉켜 풀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갈등(葛藤)이란 단어가 생겼다. 칡과 등이 만나 서로 얽히듯이 개인이나 집단이 이해관계로 적대시하거나 대립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갈등이란 단어의 유래는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동안 오른쪽 한 방향으로만 감고 오르는 것으로 알려진 등이 실상은 왼쪽과 오른쪽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용등, 이루지 못한 애틋한 사랑이 잠들다

경북 경주시 현곡면 오류리에는 천연기념물 제89호로 지정된 특별한 등나무가 있다. ‘용등(龍藤)’이라고도 부르는 등나무는 옆에 있는 팽나무와 얽히고설켜서 팽나무를 감싸 안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여기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남녀 간에 이루지 못한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때는 바야흐로 고구려·신라·백제가 한창 쟁탈전을 벌이던 삼국시대, 서라벌에 사는 한 자매가 공교롭게도 이웃집 청년을 남몰래 사모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전쟁터에 나간 청년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자매는 실의를 견디다 못해 함께 연못에 몸을 던졌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청년은 훌륭한 화랑이 되어 돌아왔다. 자매의 슬픈 사연을 알게 된 청년은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그만 자매의 뒤를 따르고 말았다. 이듬해 자매가 죽은 자리에서는 등나무가 자라기 시작했다. 뒤이어 청년이 몸을 던진 곳에서는 팽나무가 움을 틔웠다. 등나무와 팽나무는 한데 얽혀 자라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생전에 이루지 못한 사랑을 죽어서나마 이룬 것이라고 여겼다. 그 후 신혼부부 원앙금침에 등나무 꽃을 말려서 넣어주면 금실이 좋아진다는 속설이 생겼다. 등나무 잎을 달여 마시면 소원하던 부부 관계가 좋아진다는 얘기도 더해졌다.

우리 삶 가까이에서 만나는 등

등은 계절의 여왕이라 불리는 5월에 연보랏빛 꽃망울을 일제히 터뜨린다. 포도송이처럼 풍성한 꽃차례는 화사하면서도 싱그럽다. 게다가 향기 또한 달콤하고 그윽하다. 그래서 등꽃 필 무렵이면 등나무 아래에는 온갖 벌이 모여들어 윙윙거린다.
등 중에는 하얀색 꽃을 피우는 종류도 있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서는 하얀색 등꽃을 보기가 쉽지 않다. 하얀색 등꽃은 아무래도 연보랏빛 등꽃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아름답기 때문일 터. 참고로 하얀색 꽃을 피우는 등은 연보랏빛 꽃을 피우는 등과 구분해 따로 흰등[白藤]이라고 부른다.
등은 콩과에 속하는 덩굴성 나무인 만큼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란다. 또한 공해와 추위에도 잘 견딘다. 그런 까닭에 우리 선조들은 일찍이 등나무 덩굴을 이용해 천연의 그늘 쉼터를 만들었다. 조선 후기 화가 이인문(李寅文)의 <고송류수첩(古松流水帖)>에는 시렁 위에 얹힌 등나무 덩굴 아래에서 열심히 부채질하며 찻물을 끓이고 있는 어린아이가 등장하는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은 선비들의 한가로운 일상사를 주제로 한 작품으로, 특히 섬세한 필치와 청신(淸新)한 담채(淡彩)가 돋보이는데, 당시에 이미 등나무 시렁을 이용한 그늘 쉼터가 있었다는 점이 무척 이채롭다.
등은 오늘날에도 도시민에게 더없이 친근한 나무다. 치렁치렁 늘어지는 연보랏빛 꽃차례는 5월의 봄을 풍성하게 해주고, 뙤약볕이 내리쬐는 한여름에는 초록의 그늘을 드리워 시원한 쉼터를 제공해준다. 그러다 보니 도심의 아파트 단지나 학교, 관공서, 공원 등에는 곳곳에 등나무 쉼터를 마련해놓았다. 내가 사는 아파트 단지만 해도 등나무 쉼터가 여러 곳 있는데, 인근에는 아예 ‘등나무 근린공원’이라 이름 지은 공원도 있다.
등은 이 밖에도 쓰임새가 다양해 여러모로 우리 실생활에 이용해왔다. 껍질은 등포(藤布)나 종이[藤紙]의 재료가 되었고, 줄기는 지팡이나 바구니, 등거리 등 생활용품을 만드는 데 사용했다. 꽃은 새순과 함께 등화채(藤花菜)라고 해서 나물로 무쳐 먹었다. 민간에서는 차로 달여 마시기도 했다.

영동선 신기역

강원도 삼척시에 자리한다. 1940년 8월 1일, 묵호~도계역 간 삼척철도 개통과 더불어 영업을 개시한 이래 지금에 이른다. 신기역은 그동안 여객 수요 감소와 화물 취급 중지로 폐역이 될 운명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동해~도계역 간 6개 역을 무인역으로 운영하면서 다행히 영동선의 주요한 운전 취급역으로 살아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