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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인 소나타

글 손민두 기자(광주본부) 일러스트 박경진

울릉도는 동해의 망망대해에 우뚝 솟은 섬이었지만, 윤희와 나 두 사람에겐 더할 나위 없이 자유로운 해방구였다. 무엇보다 서울에서처럼 남의 눈을 의식할 필요가 없어 좋았다. 게다가 아무리 치밀하고 판단이 빠른 그녀의 아버지라 할지라도 설마 우리가 여기까지 도망치리라곤 생각지 못할 터여서 더욱 마음이 놓였다. 섬 어디를 가나 펼쳐진 아름답고 빼어난 풍광도 낯선 행성에 와 있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을 달뜨게 했다.

비록 위험하고 고된 오징어잡이 배에서 일했지만, 그것은 우리가 누리는 자유를 위해 지불할 당연한 대가였다. 오히려 수고해 번 돈으로 생활에 필요한 물건을 하나하나 장만하며 맛본 기쁨은 우리로 하여금 행복의 의미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할 수 있게 했다. 행복이란 어떤 절대치가 정해진 것이 아니었다. 차근차근 만족하는 점진성 그 자체였다.

우리는 틈만 나면 두 손을 꼭 잡고 바닷가를 산책하거나, 울릉종합고등학교 음악실을 찾아갔다. 그녀는 내가 집어등이 대낮처럼 환한 배에서 일하며 바라본 밤바다의 풍경을 작곡한 곡을 칠 때 가장 행복해했다. 나와 윤희의 꿈같은 시간은 거의 6개월가량 계속됐다.

마침내 그녀의 아버지가 울릉도를 찾아왔다. 선주가 품삯으로 입금한 돈이 화근이었다. 금융기관과 이리저리 손이 닿은 그녀의 아버지는 나의 ‘금융거래 내역’을 손에 넣었다. ‘농협 울릉지점.’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 독 안에 든 쥐가 돼 있었다. 결국 우리의 해방구 울릉도는 오히려 그녀의 빠른 추쇄를 돕는 편리한 표적이 되고 말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내가 오징어잡이 배에 오르는 시간을 기다려 우리가 살던 집에 들이닥쳤다.

한 존재의 흔적은 참으로 허망했다. 한 짝이 뒤집힌 채 나뒹구는 슬리퍼, 옹색한 벽에 기대 볼품없이 일그러진 비키니 옷장, 어지럽게 흩어진 옷가지, 갑작스러운 그녀의 부재가 가져온 공간의 공허함은 과연 우리가 몸을 누인 곳인가 의심이 들 만치 낯설고 황량했다. ‘우리가 나눈 사랑은 정말로 꿈이었나.’
나는 저주의 가사처럼 내 앞에 놓인 슬퍼할 시간 앞에서 온몸이 단단히 결박된 죄인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거대한 절망이 파도처럼 몰려왔지만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터질 것 같은 가슴을 안고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저만치 커다란 후박나무가 우듬지를 펼치고 우뚝 서 있었다. 기둥에 이마를 갖다 댔다. 미친 듯이 거기에 머리를 찧으며 손톱에 피가 나도록 기둥을 후벼 팠다. 나는 차라리 그녀가 떠나버린 슬픈 바다를 바라볼 힘도, 의지도 고갈되어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짧은 해가 막 기운 1월의 바다는 공동묘지처럼 음산하고 괴기스러웠다. 스멀스멀 다가오는 어둠은 저승사자의 그림자인 양 으스스하고, 방파제를 때리는 파도 소리는 초혼(招魂)을 위해 흔드는 무당의 방울 소리처럼 섬뜩하고 오싹했다. 그러나 나는 이상하게도 이 모든 것이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지금 그녀가 탄 배가 육지로 가고 있을 터였다. 나는 넋 나간 사람이 되어 그녀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고 또 불렀다.

검게 물든 바닷물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검디검은 바다가 먹빛 화폭으로 바뀌더니 그 위에 연미복을 입은 그녀가 창백한 얼굴로 나타났다. 그녀가 연주를 시작했다. 웬일인지 검은 건반만 골라 두드렸다. 슬픈 소나타가 흘러나왔다. 갑자기 그녀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화음이 뒤죽박죽 뒤엉켜 불협화음이 생겼다. 별안간 그녀가 희고 고운 나신으로 물 위에 떴다. 나는 물속으로 풍덩 뛰어들었다.

그녀를 껴안으려고 발버둥 쳤다. 그러나 그녀의 몸은 나의 팔다리가 일으키는 물장구에 산산조각 물거품으로 흩어질 뿐이었다. 숨이 가빴다. 죽음의 공포가 엄습했다. 아까보다 더 허우적댔다. 한데 한쪽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내 몸에 마비가 온 건가. 그러면 죽을 수밖에’, ‘그래 죽자. 그녀 없는 세상은 무의미하니까’.
나는 죽기로 작정하고 바다에 그대로 몸을 맡겼다. 그러자 방금 거품으로 사방에 흩어진 그녀의 몸 조각이 한데 모아져 다시 완전한 나신으로 변모하는 게 아닌가.

‘아, 윤희!’
그녀의 벗은 몸이 형광등 불빛처럼 파르스름한 빛에 휩싸였다. 예전 그녀의 교복에서 나오던 신비로운 빛과 같은 것이었다.
‘내가 살기 위해 움직이면 그녀가 다시 포말로 사라지고 말 것이다.’
나는 모든 움직임을 멈춘 채 가만히 그녀를 바라만 보았다.

-7월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