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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툰 <나! 이봉창>을 읽고

지난해는 3·1 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등을 맞이해 그 어느 때보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이 높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이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고
명실상부한 선진국 대열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데는 바로 독립운동을 비롯해 자유민주주의 수호에 앞장선
수많은 순국선열이 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2020년 올해는 8·15 광복 75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글 김지호(대구본부) 일러스트 제공 김수박(<나! 이봉창> 작가)

철도 위인, 이봉창 의사

수많은 독립운동가 중 우리 한국철도인이라면 꼭 잊지 말아야 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이봉창 의사이시죠. 중국 상해임시정부에서 김구 선생이 조직한 한인애국단에 가입해 1932년 1월, 일본의 수도 도쿄 한복판에서 일본 천황이 타고 있는 것으로 추정하는 마차를 향해 폭탄을 던짐으로써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든 바로 그분. 하지만 그 마차에는 천황이 타고 있지 않았고, 결국 현장에서 체포되어 감옥에서 갖은 고초를 겪다 1932년 10월 순국하셨다는 이야기, 아마 많이들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런데 ‘이분이 우리 철도와 무슨 상관이 있길래?’ 하고 의문을 가지는 분도 있을 텐데요, 지금부터 소개하려는 이야기가 바로 이봉창 의사가 펼친 생생한 철도 활약기랍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철도에서 ‘철도 위인’으로 기리는 이분에 관한 이야기를 포털 사이트 다음에서 연재한 웹툰 <나! 이봉창>과 함께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24부작 <나! 이봉창> 속으로

이야기는 거사 실패 후 감옥에서 조사받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거사를 일으키도록 사주한 배후를 밝히라고 일제가 닦달하지만, 이봉창 의사는 끝내 김구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백정선이라는 인물이 자신의 배후라고 주장하며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김구 선생과 상해임시정부를 보호하려 합니다. 백정선이라는 인물이 김구 선생일 것이라는 심증만 있지 물증이 없는 일제는 결국 김구 선생을 체포하는 데 실패합니다. 실제로 이봉창 의사와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김구 선생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고초를 겪으셨다고 합니다. 웹툰에서는 김구 선생과 이봉창 의사의 첫 만남을 비롯해 헤어지던 그 순간까지의 내용을 그립니다.

웹툰에서 이봉창 의사는 서울 용산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것으로 나옵니다. 그러나 일제가 한반도에 철길을 놓는 과정에서 용산 일대의 땅을 마구잡이식으로 수용했는데, 이때 이봉창 의사의 집 또한 일제에 빼앗기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본인으로부터 부모님이 고초를 겪는 등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에 놓이게 되어 간신히 오늘날의 초등학교 정도의 학력만 마친 채 생업 전선에 뛰어드는 과정을 그립니다. 과자점과 약방 등에서 점원으로 고생하다가 용산역의 용인(庸人)으로 채용되어 연결수(連結手) 역부(役夫)가 되는 것으로 철도와 인연을 맺죠. 오늘날로 치면 용산역 수송 담당 역무원으로 근무한 셈입니다. 웹툰에서는 집이 망해 생업을 이어가야 하는 심정에 대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다만 이곳에서 근무하며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고, 일을 잘해서 너 나 할 것 없이 주변에서 이봉창 의사를 좋아했다는 내용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상한 점을 느낍니다.

몇 년째 근무해도 승진에서 계속 밀리는 한편, 급여도 적었을 뿐 아니라 뒤늦게 들어온 후배들이 먼저 승진하거나 다른 업무를 맡는 등 이 의사는 민족 차별이라는 슬픈 현실에 직면합니다. 사실 민족 차별 의식은 어릴 때부터, 그리고 과자점과 약방 등에서 근무할 때도 느꼈습니다. 뭐만 했다 하면 “조선인이…” 하는 식으로 차별 대우를 받은 것이 일상이던 당시 세태 속에서 철도라고 다를 것은 없었으니까요. 이봉창 의사보다 뒤늦게 들어왔지만 승진이
빨랐던 이들도 결국 다 일본인이었습니다. 방황하던 청년 이봉창은 결국 1924년 4월 14일, 24세의 나이에 철도원 생활을 접고 좀 더 나은 미래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은 채 일본으로 건너갑니다.

그런데 그 기대는 그야말로 착각이었습니다. 그곳에서도 조선인에 대한 차별은 계속되었고, 일자리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오사카 가스 회사에 근무할 때는 아예 일본인 행세를 했더니 그때부터 대우가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조선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났고, 결국 급여가 삭감되는 등 차별 대우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게다가 히로히토 천황의 즉위식을 구경하고자 교토에 갔더니 단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경찰에 끌려가 10여 일을 유치장에서 지내야만 했습니다. 결국 그렇게 싹튼 반일(反日) 의식을 바탕으로 중국 상하이로 건너간 이봉창 의사는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고 웹툰은 그리고 있습니다.

용산역 역부로서의 삶

이 웹툰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은 이봉창 의사의 일생 중 용산역 역부로서의 삶입니다. 일제가 자랑하던 당시 최첨단 교통수단, 철도. 하지만 당시 철도는 그들이 수탈하기 위해 이용했다는 점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민족 차별의 뿌리는 깊었고,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비롯해 식민지 근대화론 등의 이야기는 죄다 헛소리였다는 점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우리 철도의 탄생과 성장기는 매우 불우하다는 이야기가 되겠지요. 청년 이봉창이 행한 거사가 일어날 환경을 미리 깔아준 셈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마냥 안타까워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뿌리 깊은 민족 차별 속에서 이봉창 의사의 의거와 같은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결국 이 땅의 진정한 주인은 조선인, 즉 지금의 우리 민족이라는 점을 오히려 잘 드러내주고 있는 증거니까요. 그리고 철도가 그런 애환을 간직하고서도 오늘날 우리 국민의 실생활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는 점은 그 철도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잘 알려주고 있으니까요.

이봉창 의사는 의거 직후 당신이 아닌 다른 일본인이 용의자로 몰려 구타를 당하자, 침착하게 “숨지 않을 테니 난폭하게 굴지 말라!” 라고 오히려 일본 경찰들을 향해 소리치며 그들에게 끌려갔다고 전해집니다. 그리고 1932년 10월 순국했는데, 해방 후 우리 기술로 처음 운행하게 된 열차 ‘조선해방자호’에 윤봉길 의사, 백정기 의사와 함께 부산에서 서울로 유해를 옮겨와 오늘날 서울 효창공원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삼의사 묘소’로 잘 알려진 곳이기도 한 효창공원이 용산역과 그리 멀지 않다는 점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민족의식이 싹튼 용산에서 잠들어 계신다는 점 또한 아이러니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는 6월 28일 철도의 날을 맞아 시간이 된다면 효창공원을 찾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지금까지 다음 웹툰 <나! 이봉창>에 대한 소개였습니다.

사람 간의 대화가 곧 인터뷰

‘인터뷰’의 사전적 정의는 “기자가 취재를 위하여 특정한 사람과 가지는 회견 또는 면접 등”을 의미한다. 인터뷰어(interviewer)가 인터뷰이(interviewee)를 상대로 생각을 공유하고 기록을 남기는 데 인터뷰의 의의가 있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공자는 인터뷰이, 그의 후학들은 인터뷰어로 볼 수 있다. <논어>는 그러한 인터뷰에서 나온 산물이다. 요즘 인터뷰는 신문·방송사 기자들과 유명 연예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주위 친구나 가족들, 더 나아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대화 역시 인터뷰의 한 과정이다. 누구나 매일, 인터뷰이 혹은 인터뷰어가 되어 소통하며 살고 있기에.

오늘날 우리는 각종 매체의 발달로 인터뷰 홍수 시대에 살고 있다. 각종 방송에서는 유명 인사의 인터뷰가 방영되고, 신문·잡지의 지면에서도 인터뷰 기사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인터넷의 발달로 탄생한 SNS 덕분에 평범한 사람들도 인터뷰 홍수 시대의 주역이 되었다. 트위터를 통해 소위 ‘오피니언 리더’와 인터뷰를 하고, 페이스북에서 친구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인터뷰 과정에서 상대를 배려하는 ‘예(禮)’의 정신이 결여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SNS는 첨예하게 대립이 되는 사안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을 때 인신공격과 감정적 발언이 잦은 경우가 많다. 이 같은 현상은 개인 메시지가 타인에게 공개적으로 노출된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한국철도 광장 열린게시판은 어떠한가

열린게시판은 철도 직원의 관심사와 의견을 엿볼 수 있는 유일무이한 공간이다. 한국철도 내 유익한 정보와 이슈 등을 쉽게 접할 수 있고, ‘인터뷰’ 역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험담이나 영양가 없는 농담조의 이야기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입으로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는 속담이 지금은 “한번 올린 글은 되돌릴 수 없다”로 바뀌어야 할 형국이다.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열린게시판의 순기능은 너무나 많다. 익명성이 보장되는 자유는 배려와 질서 속에서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우리 전통에는 상대방과 관계를 맺을 때 상대방을 배려하는 ‘예(禮)’의 정신이 있었다. 인터뷰를 통해 사람이 지닌 긍정적 삶의 마음가짐을 공유해 세상이
나아진다면 그것만큼 값진 것도 없다. 오늘날과 같은 인터뷰 홍수 시대에 필요한 것은 ‘예(禮)’라는 제방이다. 인터뷰할 여건은 이미 충분하다. 다만 거기에 덧붙여 타인의 마음 헤아리기를 내 마음처럼 하는 태도가 함께한다면 적어도 물난리는 나지 않을 것이다. <논어>라는 인터뷰 모음 글이 오늘날까지도 전해지는 이유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 서로를 배려하는 ‘예(禮)’ 정신 덕분이 아니었을까. 또 다른 인터뷰의 고전(古典)이 탄생하기를 기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