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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가을, 순창으로 여행을 떠났다. 며칠 전 태풍이 지나간 하늘은 비바람에 세수를 한 듯 유난히 푸르렀다.
넘실거리는 뭉게구름에 기분이 상쾌했다. ‘아, 이제 정말 가을이구나!’ 하는 마음과 함께 기다리던 날이 온 것 같아
마음까지 맑아졌다. 여행은 곧 즐거움이다. 일상에서 벗어나 떠난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 설레고 잠을 설치게
되니까. 비라도 내리면 어쩌나 싶었지만 그건 기우였다.

글과 사진 방병택(서울본부)

용산역에서 오전 9시 55분에 출발하는 여수행 KTX-산천에 올랐다. 얼마 만의 기차 여행인가. 어릴 적 소풍날의 설렘도 아니고 부모님 손 잡고 시골 할아버지 댁에 가던 여행도 아니다. 모처럼 직원들과 떠나는 마음 편한 여행! 보고, 듣고, 배우고, 체험하는 1박 2일 순창 체험 여행은 고추장 내음 물씬 풍기며 시작되었다.

기차의 흔들림은 어머니의 자장가

기차가 서서히 움직이는가 싶더니 도심을 벗어나 평야 지대를 달린다. 가슴이 뻥 뚫리는 상쾌함이다. 역시 떠나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성격이 급한 나무는 벌써 단풍 흉내를 내고, 멀리 황금색으로 바뀌기 시작한 들판에 서 있는 키 큰 허수아비가 한 폭의 풍경화를 그려놓았다. 뜨거운 태양 열기에 곡식이 알알이 영글어간다. 소리 없이 달리는 기차는 강을 만나고 산을 만나더니 또 다른 들을 지난다. 얼마 만에 누리는 여유이고 한가로움인지 가마득한 기억을 더듬는다. 잔잔한 수면 위를 지나는 배처럼 편안함과 휴식을 안겨준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잠자는 아기가 되어본다.

순창의 첫인상

순창은 전라북도 남부 노령산맥 동쪽에 위치한다. 섬진강을 경계로 남원과 임실, 장성, 담양, 곡성군 등과 접하는 산간지대이며 분지 형태다. 강천산이 유명하고, 고추장을 비롯해 전통 장류의 고장으로 남도 음식의 명성이 자자하다. 남원역에서 내려 버스로 40분을 달리면 순창군 전경을 눈에 담을 수 있다. 전형적인 농촌 풍경이다. 나뭇잎 무성한 가로수와 들판의 곡식은 순창에 살라고 유혹의 손짓을 보낸다. 분지 특유의 지형으로 균이 자라기 좋은 온도와
습도를 갖춘 최적의 장소, 순창. 이곳의 오염되지 않은 맑은 물과 공기는 장 문화를 발달시킨 주역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남도에 오면 음식이 빨리 먹고 싶어진다. 예약한 식당의 정갈한 밑반찬이 식욕을 돋운다. 커다란 도자기에 가득 담겨 나온 한방 백숙을 보는 것만으로도 큰 즐거움이다. 진한 국물에 약재와 버섯을 넣은 백숙으로 허기진 배를 채웠다. 주인이 권한 귀한 술은 서울 전통주 품평회에서 준우승한 곡주라고 한다. 쌉싸름하면서 달짝지근하다. 취기가 더해지니 태평성대에 순창이 내 고향이다.

강천산 계곡

넓은 들판의 곡식이 익어간다. 넉넉한 시골 인심과 밝은 미소가 어우러져 부족함 없는 태평성대다. 강천산 입구에서 환하게 맞아주는 해설사의 안내를 받으니 환대를 받는 귀한 손님인 듯 우쭐해진다. 연초록빛을 띠는 나뭇잎 사이로 따사로운 햇살과 시원한 바람, 이름 모를 풀벌레들의 노랫소리가 들린다.
신라 시대 도선국사가 ‘옥을 굴리는 아름다운 계곡’이란 의미로 강천산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이곳의 계곡이 섬진강과 영산강의 원류다. 경치에 젖어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 길을 걷다 보니 거친 물소리가 들린다. 위를 쳐다보니 절벽에서 세찬 물줄기를 토해낸다. 기암절벽에서 떨어지는 물줄기는 병풍을 친 신비스러운 모습이다. 태고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병풍폭포가 위용을 뽐낸다.
이런저런 상념을 떨쳐버리고 모처럼 만끽하는
여유로움이다. 해설사의 안내와 계곡물 소리가 앙상블을 이뤄 합주곡처럼 들린다. 어느새 정상에 올랐다. 여기서 현수교를 만났다. 현수교에 서니 계곡의 아름다움이 한눈에 들어온다. 강천산은 어느 곳보다 가을 정취를 오래 간직한다고 했다. 특히 애기단풍을 늦게까지 간직하는 곳이라던데, 그 말이 사실이었다.

1용산역에서 탑승한 여수행 KTX- 산천. 2 강천산 현수교 위에서 찍은 기념사진.

 

장류박물관과 가이아교육농장

우리는 식사 때마다 고추장이나 된장 또는 김치를 쉽게 만난다. 우리의 독특한 문화다. 이 문화가 점점 사라지고 있지만, 전통을 지켜나가며 계승하는 지역이 순창이다. 장류 문화를 보존하고 있는 장류박물관에 들렀다. 전시실에는 다양한 고추장 만드는 과정이 소개되어 있다. 또 음식이나 곡식을 넣고 찧는 절구통에 직접 콩을 넣어보는 체험도 가능하다. 과거 할머니와 어머니가 직접 담그시던 고추장과 된장을 박물관에서 담가보며 체험할 수도 있다.
‘가이아’는 그리스 신화 속 대지의 여신 이름이다. 여기서 농원 이름을 딴 가이아교육농장은 미나리와 연꽃을 직접 재배·가공하고 판매하면서 자연과 동화되어 살아가는 공간이다. 농장 곳곳을 둘러보는데 주인이 일행을 이끌며 하늘을 물들이는 붉은 석양을 보라고 했다. 순간, 모두 환호성을 내지른다. 황금빛 들판과 붉은 하늘이 어우러진 풍경이 가슴에 뜨거운 무언가를 남긴다. 농장 주인은 이 풍경을 가장 아낀다고 했다. 체험장에 준비된 미나리와 사과, 꾸지뽕을 넣어 해독 주스를 만들었다. 진한 미나리와 과일 향이 느껴진다. 마셔보니 속이 부드러워지는 느낌이다. 갓 딴 미나리에서는 단맛과 함께 싱싱함이 느껴진다. 체험장 한쪽에서는 우리가 먹을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다. 연잎 위에 초벌구이한 통통한 삼겹살이 올라 있다. 또 연근이며 감자볶음이며 정갈한 반찬이 차려져 있다. 삼겹살과 함께 먹는 미나리의 향이 머리를 맑게 만들어주는 듯하다.

 

1가이아교육농장의 현판. 2 장류박물관 전경. 3 순창에서 만난 일상은 그 자체로 힐링이 되었다. 4 전통 음식 체험 곳간애복에서 진행한 떡 만들기 체험.

밤은 깊고 아침은 짧다

섬진강을 끼고 자연과 어우러진 초원 위에 펜션이 있었다. 이곳에 여장을 풀었다. 여러 번 느끼는 바지만, 맑은 공기와 물은 어디나 변함이 없다. 벤치에 누워 밤하늘에 총총 떠 있는 별을 보다가 어린 시절 찾아보던 별자리를 발견했다. 다음 날 아침, 새벽부터 눈이 떠졌다. 이렇게 좋은 곳에서 잠을 자기엔 시간이 아깝다. 짙게 피어오른 안개 주변으로 곡식 익어가는 모습, 산 사이로 흐르는 안개구름 등이 펼쳐진다. 순창은 주민 복지가 향상된 곳이다. 면 소재지마다 목욕탕이 있고, 면민 누구나 저렴한 비용으로 이용할 수 있다. 특히 어르신을 위한 지원이 다양한데, 홀로 계신 어르신을 배려하는 부분에서 이 점을 확실히 느꼈다. 나도 이른 시간 목욕탕을 찾았다. 농촌 어르신들은 역시 부지런하다.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이 아침 목욕을 즐기는 모습을 보니, 순창이 왜 장수의 고장인지 알 것 같았다. 전날 쌓인 피로를 말끔히 풀고 나오니 몸과 마음이 개운하고 상쾌하다.

장군목 요강바위
순창군 동계면은 섬진강 줄기 3km에 걸쳐 장군목 유원지와 요강바위가 있는 환상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산허리를 휘돌아 감는 강어귀는 여인네의 허리처럼 가냘프면서 골이 깊다. 용의 모습을 하고 있다 하여 용궐산이라고 부르는 산이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형상이다. 희귀한 형상의 바위들이 운치를 더한다. 여기저기 흩어진 바위를 바라보면 그 한가운데 우람한 바위가 서 있다. 요강 형상을 하고 있어 요강바위라 부른다. 깊이가 2m이니 어린이들의 놀이터이기도 하다. 이 바위에서 치성을 드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아들을 원하는 여인네는 이 요강바위에 앉아 아들을 얻고자 빌었을 것이다. 장군을 닮은 우람한 아들을 얻고자 노력했을 여인네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장군목에서 경치에 취해 사진을 찍다 보니 갈 길을 잃었다. 위로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가 보여 올라가니 주변 경치가 한눈에 들어온다. 라이딩을 즐기는 동호인들의 인기 코스라고. 문득 자전거를 타고 싶은 생각이 든다. 물안개
피어오르는 강가를 시원스레 달려보는 상상에 빠진다.

전통 음식 체험 공간, 곳간애복

늦은 아침을 콩나물해장국으로 때우고 향한 곳은 ‘곳간애복’이다. 곳간에 복이 들어오라는 뜻이다. 이 곳에서는 떡 만들기와 천연 염색을 체험할 수 있다. 떡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인 모시와 쑥은 6000여 평의 땅에서 직접 재배한다. 체험장에서 우리를 환하게 맞이해주는 원장님의 다정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원장님이 미리 준비해놓은 반죽으로 송편을 빚었다. 누군가는 동물 모양을 만들고, 또 다른 이는 물건 모양을 만들었다. 각자 원하는 형상대로 떡을 빚으며 재잘재잘 유쾌한 시간을 보냈다. 이후 우리가 만든 떡을 쪄서 내왔는데, 그 빛깔이 탐스럽다. 맛 또한 일품. 역시 잘생긴 떡만 맛있는 건 아니다. 염색장에는 잎이 무성한 나무가 가득하다. 옷을 만드는 실을 뽑는 삼나무라고 한다. 껍질을 벗겨 가늘게 찢으면 모시를 짜는 실이 된다고 한다. 이런 식물과 나뭇잎을 이용해 자연 염색도 체험했다.

순창, 참 좋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살아가던 평범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자연과 친해지고, 자연의 소중함도 더불어 알게 된 여행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때 얻은 소소한 즐거움에 엔도르핀이 솟았다. 새롭게 배우고 익히는 것은 늘 기쁨이고 희망이다. 무공해 지역인 순창에서 체험한 여러 가지 경험은 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던 고향의 모습을 선명하게 만들었다. 문득 기차가 오지 않는 곳이어서인지 멀게 느껴졌다. 이곳에 기차역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오염되지 않은 청정 지역에서 생활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큰 축복이다.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은 그 자체로 힐링이다. 일상에서 벗어나는 일이 쉬운 건 아니지만 다시 한번 시간을 내어 순창으로 떠나고 싶다. “순창, 참 좋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직원들과 함께한 알찬 1박 2일 여행기를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