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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경원선은 동두천~연천 간 단선전철 공사를 위해 지난해 4월부터 동두천~백마고지 간 통근 열차 운행이 중단된 상태다. 공사가 끝난 후 과연 열차 운행이 재개될지 궁금해하는 이가 많다. 언젠가 경원선도 남북이 연결되어 경의선처럼 시끌벅적하게 시험 운행이라도 해보면 좋겠다. 그리고 더 늦기 전에 금강산전철을 복원해 기차를 타고 금강산을 구경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끝없이 이어진 철길을 달리며 철도 부설과 압제 속에 얽히고 맺힌 민족의 한을 모두 풀어내고 싶다

글과 사진 배은선(수도권서부본부)

살기 좋다는 원산

“감푸른 바다 바다 밑에서 줄지어 떼 지어 찬물을 호흡하고”로 시작하는 가곡 ‘명태’를 처음 들은 것은 아마도 우리 가곡에 푹 빠져 있던 1980년,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인 것 같다. 지금은 고인이 된 바리톤 오현명 선생의 전매특허와 같았던 기상천외한 곡이다. 이 노래가 처음 발표된 것은 1952년 부산 피란 시절이라고 하니 당시 청중은 얼마나 황당했을까? 양명문 시인이 짓고 변훈 씨가 곡을 붙인 이 가곡은 명태의 일생을 해학적으로 묘사했는데, 그 명태의 성장 배경이 동해 바다이며, 어부의 그물에 걸려 생을 마감하는 곳이 바로 원산이라고 되어 있다.
“어떤 어진 어부의 그물에 걸리어 살기 좋다는 원산 구경이나 한 후 (후략).” 광복과 함께 남북이 나뉜 지 벌써 75년이 되었으니 그 살기 좋았다는 원산의 풍요로움을 기억하는 이도 거의 없을 것이다.

그 이름, 경원선

우리는 경부선 용산에서 분기해 청량리를 거쳐 전곡과 연천, 백마고지에 이르는 노선을 지금도 경원선이라고 부른다. 분단 이전에는 원산까지 222.7km 구간의 철길을 부르던 이름이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경의선과 마찬가지로 경원선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는다. 일제가 지은 이름이기도 하지만, 남쪽의 서울(옛 경성)을 기준으로 삼은 명칭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북방 한계선 가까이에 있는 평강에서 원산을 지나 옛 함경선 지역인 고원까지 145.1km 구간을 강원선이라 부르고 있다. 경원선 부설 과정에도 사연이 많다. 쇄국을 고집하던 대한제국이 외세에 굴복해 문호를 열기 시작한 것은 ‘조일수호조규’, 즉 강화도조약 이후다. 이 조약에 따라 삼면이 바다인 한반도 서쪽엔 인천, 남쪽엔 부산, 동쪽엔 원산에 각각 항구를 열어주었고, 훗날 서울에서 이들 세 항구를 잇는 철길이 열리니 경인철도, 경부철도, 경원선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국내 정치 상황과 국제 정세에 따라 항구가 열린 것과 철길이 놓인 순서는 달랐지만, 이 항구와 철길을 통해 허다한 물산과 사람이 오갔으며, 이 나라는 마치 젖 빨리는 어미처럼 점점 야위어갔다.

일본은 미국이 선점한 경인철도 부설권을 힘들게 사들였고, 경부철도 부설권은 막강한 힘을 동원해 어렵지 않게 얻어냈다. 그런데 경원선은 만만치 않았다. 조선 정부가 끝까지 자력 건설 의지를 내보이며 프랑스와 독일·러시아·일본 등의 부설권 요구를 거절하고, 궁내부에 서북철도국을 설치해 경의선과 경원선 건설을 관장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한제국 정부는 경원선과 함께 두만강에 이르는 경흥선 부설권을 국내철도용달회사에 허가했다. 이 회사는 박기종 등이 설립한 것으로, 1899년 7월 25일 혜화문 밖 삼선동을 기점으로 의정부를 거쳐 양주군 비우점에 이르는 약 40km 구간을 측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력 건설을 시도한 다른 노선과 마찬가지로 이 회사도 자금난에 부딪혀 주저앉고 말았다. 이것을 지켜보고 있던 일본은 처음에는 경의선과 마찬가지로 자금 대부를 통한 회사 운영권 장악을 계획했다. 그러나 러시아와의 전쟁을 앞두고 마음을 바꿔 1904년 9월 2일 하야시 공사를 통해 대한제국 정부에 경원선 군용 철도 건설 방침을 ‘통보’하는 글을 보냈다. 복잡한 대화와 협상, 전략과 투자 대신 군대를 동원하기로 한 것이다.

순서대로) 초창기의 원산역, 철원역 개통 기념식(1912년 10월 21일), 데로1형 전기기관차(1944년).

일본은 처음에는 경의선과 마찬가지로 자금 대부를 통한 회사 운영권 장악을 계획했다. 그러나 러시아와의 전쟁을 앞두고 마음을 바꿔 1904년 9월 2일 하야시 공사를 통해 대한제국 정부에 경원선 군용 철도 건설 방침을 ‘통보’하는 글을 보냈다. 복잡한 대화와 협상, 전략과 투자 대신 군대를 동원하기로 한 것이다.

경원선 부설 과정

일제가 러시아와의 전쟁을 앞둔 상황에서 군대를 동원해야 할 만큼 철도 건설을 중요하게 여긴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경부선과 경의선이 한반도를 종단해 대륙으로 연결되는 직통로였기 때문이며, 경원선은 원산이 동해를 사이에 두고 일본의 니가타, 쓰루가 등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핵심 항구였기 때문이다.

대한제국에 군용 철도 건설을 통보하기에 앞서 국내 주둔한 일본군은 1904년 6월 경성~원산 간 도로를 정찰했으며, 8월에는 철도 부설을 위한 현지 정찰을 실시했다. 임시군용철도감부는 1904년 9월 4일 원산철도건축반을 설치하고, 원산~용지원 간 약 35km 구간의 공사 계획에 착수했다. 측량 작업은 12월에 마무리했으며, 실제 공사는 11월 10일 원산 부근에서 시작했으나 동절기를 맞아 중단했다가 이듬해인 1905년 3월 공사를 재개했다. 7월 하순 원산에서 약 16km의 노반 공사 및 교량 가설을 마친 후 예산 부족으로 공사를 중단했으며, 11월 12일에는 사무소를 폐쇄했다.

용산 쪽 공사는 용산건축반이 1904년 11월 용산~의정부 간 약 31.5km 측량을 마쳤지만, 철도 부지 수용 과정에서 반발이 거세 착공이 늦어졌다. 의정부~용지원 간 측량은 1905년 2월에 측량반을 파견해 5월 22일에 완료했다. 건설공사는 8월 5일 용산에서 시작했는데, 홍수로 인해 한강이 범람하면서 공사를 중단하고, 토지 수용 등의 문제로 우여곡절을 겪다가 이듬해인 1906년 4월 1일 공사를 재개했다. 이 공사는 용산에서 약 6km 구간에 걸친 토공을 준공하는 것을 끝으로 더 이상 진척이 없었다.

그 이유는 러일전쟁이 끝나면서 추진 동력을 잃었고, 극심한 자금 압박으로 우선순위에서 밀려났기 때문이다. 결국 경원선은 공사가 중단된 상태로 1906년 9월 이미 완공된 군용 철도 경의선·마산선과 함께 한국통감부 철도관리국으로 관리와 운영이 이관되었다. 이른바 철도 경영 일원화 정책에 따른 것이다. 경원선 공사를 재개한 것은 경술국치 이후인 1910년의 일이다. 식민지 정책에 따른 정치나 군사적 필요 외에도 한반도 북부의 물자를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서는 경원선 부설이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 1914년 8월 14일, 세포~고산 간 26.1km가 개통함으로써 경원선 전 노선이 연결되었다. 그리고 9월 16일에는 원산에서 전통식(全通式)을 거행했다.

경원선의 의미

경부선이 경의선을 만나 비로소 국제 철도가 된 것처럼, 식민지 철도에서 경원선의 효용 가치는 함경선과 함께할 때 극대화되었다. 함경선이란 원산에서 한반도의 동북쪽 상삼봉까지 664km에 이르는 노선으로, 1914년 착공해 1928년 완공했다. 원산에서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다가 러시아 국경을 만나고, 다시 두만강을 마주 보며 북상을 거듭해 중국과의 국경을 내다보고, 정점에서 다시 남하해 국토 최북단을 감싸 안는 형태의 긴 노선이다. 용산에서 원산을 거쳐 상삼봉에 이르는 구간은 모두 890.6km에 이르렀으며, 초창기엔 편도 운행 시간만 해도 26시간이나 소요됐다.

경원선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금강산 관광이다. 금강산은 철도를 이용할 경우 경원선 철원에서 들어가는데, 전력 회사가 금강산전기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해 철원에서 내금강까지 전기철도를 부설함으로써 금강산 관광은 일대 호기를 맞았다. 1924년 철원에서 김화까지 28.8km를 개통한 것이 우리나라 전기철도의 효시이며, 1931년에는 내금강까지 116.6km를 전선 개통했다. 전동차를 1일 8회 운행했고, 주말을 이용한 무박 2일 코스도 운영했으며, 야간에는 침대차도 연결했다. 소요 시간은 4시간 반, 운임은 당시 쌀 한 가마 가격인 7원 56전이나 되었지만, 1936년 연간 관광객이 15만4,000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부대사업치고는 꽤 알짜배기였다.

또 경원선은 한반도 최초의 전기기관차를 도입한 노선으로, 철도 기술사적 의미가 크다. 1899년 5월 17일 서울 시내에 이미 전차가 다니기 시작했고, 1924년 12월 27일 금강산전기철도가 전철 영업을 시작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설 철도였고 차량 또한 전기 동차였다. 경원선에 전기철도를 계획한 것은 워낙 심한 구배 때문이었다. 1937년 6월 1일 전기과를 신설해 전철화 계획을 수립했으나, 1940년 3월에야 의회에서 예산이 가결되어 시행이 늦어졌다. 당시 일본에는 협궤 구간에 1,500V의 전기철도가 있었지만, 표준궤 구간에 직류 3,000V를 채택한 것은 경원선이 최초 시도였다. 1940년 12월 변전소와 전차선로 건설공사를 착공했으며, 예정보다 1년 늦게 1944년 4월 1일 복계~고산 간 53.9km의 전기철도를 개통했다. 전기기관차는 총중량 139톤의 데로1형과 136톤의 데로2형 두 종류가 있었는데, 전원은 복계와 삼방역 구외에 설치한 변전소에서 경성전기주식회사의 6만6,000V 고압 전력을 받아서 썼다.

분단 이후 경원선 남쪽은 신탄리까지만 열차를 운행하다 2006년 12월 15일 의정부~동두천 간 복선 전철이 개통되었다. 2012년 11월 20일에는 백마고지역이 영업을 개시해 총 94.4km가 되었다. 늘어난 거리는 비록 6km가 채 안 되지만, 드디어 경원선 최북단 역이 경기도에서 강원도 땅으로 넘어간 것이다.
지금 경원선은 동두천~연천 간 단선 전철 공사를 위해 2019년 4월 1일부터 동두천~백마고지 간 통근 열차 운행이 중단된 상태다. 공사가 끝난 후 과연 통근 열차가 다시 다닐 수 있을지 궁금해하는 이가 많다.

그때쯤엔 경원선도 남북이 연결되어 경의선처럼 시끌벅적하게 시험 운행이라도 해보면 좋겠다. 그리고 더 늦기 전에 금강산전철을 복원해 우리 생애에 기차를 타고 금강산 구경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물론 더 올라가면 러시아와 중국 국경도 지척이니, 끝없이 이어진 철길을 달리며 철도 부설과 압제 속에 얽히고 맺힌 민족의 한을 모두 풀어내고 싶다.

1 평양역. 2 신의주역. 3 소요산역(2006년 12월 15일). 4 경원선 의정부~동두천 간 복선 전철 개통식(2006년 12월 15일).

1899년 5월 17일 서울 시내에 이미 전차가 다니기 시작했고, 1924년 12월 27일 금강산전기철도가 전철 영업을 시작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설 철도였고 차량 또한 전기 동차였다. 경원선에 전기철도를 계획한 것은 워낙 심한 구배 때문이었다. 1937년 6월 1일 전기과를 신설해 전철화 계획을 수립했으나, 1940년 3월에야 의회에서 예산이 가결되어 시행이 늦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