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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캘리그래피 지용태(한국철도공사)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양조장 담벼락 너머로 붉게 피어난 배롱나무 꽃이 유난히 빛났다.

싸우는 듯한 시끄러운 소리에 아이가 깼다. 동이 트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았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귓전에 들려온다. 아버지께서 밤새 친구들과 놀다가 새벽에 들어오시는 바람에 엄마랑 한바탕하시는 모양이다. 단칸방에서 부부 싸움에 철모르는 아이는 잠을 깼다. 아이는 조용히 일어나서 대문을 열고 집을 나섰다. 삼복더위가 조금 지난 늦여름이지만 아직도 새벽 공기가 훅~ 하니 허파꽈리를 무겁게 요동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밖으로 나오긴 했어도 특별히 할 일이 없고, 마땅히 갈 곳도 없다. 또래 아이들은 아무도 나와 있지 않고 집 앞 신작로도 먼지 하나 일어나지 않을 정도로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아 있었다. 아이는 고민을 한다. 집에 다시 들어가자니 엄마·아버지 보기가 싫고, 그냥 있자니 뭔가 갑갑했다. 아이는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냇가로 발길을 옮긴다. 발에는 검정 고무신을 신었다. 국민학교 교복인 허름한 반바지 속에는 누렇게 바랜 삼각팬티를 입었다. 위에는 펑퍼짐한 하늘색 티를 입고 머리는 떡진 상고머리를 해 누가 봐도 난민 행색이다. 그래도 늘상 가던 냇가에 갈 수 있다는 생각에 집안일들은 잊어버린 듯 발걸음이 가볍다. 냇가까지는 30여 분.

걷다 보니 목덜미로 땀이 땟국물 되어 흐른다. 냇가이긴 하지만 그래도 폭이 10여 미터나 되고 깊은 곳은 어른 한 키를 넘는 곳도 있어서 ‘복두소’라 부르던 곳이다. 주변에 넓은 너럭바위가 있어 마당바위라고 부르기도 했다. 몇 해 전에 서울서 내려온 미모의 여자 대학생이 빠져 죽은 곳이기도 한 은근히 스산한 곳이다. 그래도 아이는 이곳이 좋았다. 아무 고민 없이 물장구치고 잠수하며 수영하는 게 좋았다. 특히 좋아하는 물놀이는 개울가에 주먹 반만 한 유난히 흰 조약돌(차돌)을 주워서 노는 거였다. 차돌을 어른 한 키 정도 되는 깊은 곳에 던져놓고 물속을 잠수해 찾아오는 놀이였다. 또래 친구들과 어울릴 때는 차돌을 던져놓고 먼저 찾아오기 경주를 했는데, 그게 그렇게 재미있었다. 몇 번의 물속 차돌 찾기 경주를 하고 나면 지치기도 하거니와 추위에 시퍼래진 입술은 바르르 떨고, 눈은 시뻘겋게 충혈되어 서로를 보고 토끼 같다고 놀려대던 기억이 났다.

하지만 오늘은 아이 혼자다. 동이 서서히 트고 있지만 아무도 오지 않는다. 물속으로 들어갈까 말까를 망설이다 결국 누런 팬티만 입고 들어간다. 어차피 할 일도 없고 집에는 가기 싫은 터였다. 혼자 흰 차돌을 찾아 던지고 몇 번 잠수를 해보지만 재미가 없다. 눈은 금방 충혈되고 입술은 떨려왔다. 싫증이 났다.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다.

잠깐 사이에 태양이 떠올랐다. 바위틈에서 젖은 팬티를 대충 손으로 짜서 입었다. 교복 반바지 밖으로 젖은 팬티의 물빛이 묻어났다. 어느덧 반바지는 다 말랐고 검게 탄 피부지만 얼굴은 뽀얀 아이로 바뀌어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양조장 담벼락 너머로 붉게 피어난 배롱나무꽃이 유난히 빛났다. 멀리 집 앞에 엄마가 나와 계신다. “아이고~ 내 새끼 세수하고 왔네.” 얼굴에 닿는 엄마의 거친 손길이 따뜻한 막바지 여름날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