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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간역의 출발은 1905년 1월 1일이다. 승강장에서 맞이방으로 들어서는 길목에 이 날짜가 적혀 있다. 역을 찾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게 되는 작은 간이역의 시작이다. 115년이라는 시간 동안 영동군 황간면 사람들의 여정에 중요한 기지 역할을 해온 황간역.
한국전쟁 때 한 번, 근대화 시기에 또 한 번 소실된 역사(驛舍)지만 재건축을 거듭하며 지금의 자리를 지켜냈다. 세월의 풍파를 견뎌내고 이제는 모두의 마음속에 고향 역으로 자리 잡은 황간역에 닿았다.

글 제민주 사진 이민희

시와 그림으로 물든 역

올해로 115년, 황간역이 긴 시간 동안 기차역으로서 생명을 이어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황간역에서 출발하는 무궁화호 한 번이면 충청남도 대전역으로도, 경상북도 대구역으로도 이동이 가능하다는 지리적 이점 때문일까? 물론 그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큰 몫을 차지하는 건 주민의 지지와 황간역을 가꾸는 이들의 사랑 덕분이 아닐까. 전국 어느 역에서도 볼 수 없는 황간역만의 풍경은 이곳이 사라져서는 안 되는 역임을 조용히 드러내고 있다.
“황간역에도 폐역 위기가 찾아왔었어요. 그때 현재 황간역 명예역장으로 계신 강병규 전 역장님이 이 역을 문화 명소로 만들어보겠다고 나섰죠. 장독에 그림을 그리고, 거기에 시도 새겨 넣었고요. 역 구석구석을 정겨운 이야기로 채워나가기 시작한 거죠. 역 주민도 역의 변화를 반겨주셨어요.”
송영철 역장이 황간역 풍경의 비화를 들려준다. 2012년 황간역장으로 부임한 강병규 역장은 역의 쇠락을 막기 위해 ‘고향 역’을 콘셉트로 역사 꾸미기에 나섰다. 폐화분, 폐항아리 등 쓸모를 다한 물건 겉면에 황간면과 연이 있는 문인들의 시를 적었고, 어울리는 그림을 함께 그렸다. 건물 외벽도 문학작품을 새겨 넣었다. 장미 넝쿨 옆에는 장미를 노래한 시를, 연잎이 자라는 연못 주변에는 연꽃을 주제로 한 시를, 심지어 맞이방 입구 쓰레기통 옆에는 재치 있게도 쓰레기통 주제의 시가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역사 한편에는 무상 전시 공간 ‘경부선 황간역 갤러리’도 조성했다.

고향 같은 너른 품의 기차역과 사랑방 손님들

2017년, 역사 2층에 ‘황간 마실 까페’라는 무인 자율 카페가 들어섰다. 황간중학교 졸업생부터 각지 문화 예술인 등 황간역과 고향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여 만든 황간마실협동조합이 운영하는 곳이다. ‘기찻길 바로 옆 문화 사랑방’이라는 기치를 걸고 있는 이곳에서는 황간면 여행 안내를 비롯해 시 낭송회, 독서 모임, 음악회 등 다채로운 문화 행사가 펼쳐진다. 카페에서 가장 넓은 벽면에 그려놓은 월류봉과 반야사 등 황간면의 주요 명소를 소개한 ‘황간 마실 여행 안내 지도’도 눈에 들어온다. 이것도 강 명예역장의 작품이라는 게 역무원의 귀띔이다.
코로나19 여파로 역 방문객이 전년 대비 감소한 상황이지만, 황간역을 궁금해하는 이들은 승용차를 이용해 이곳을 찾기도 한다. 또 주변 유치원의 소풍 장소로도 역은 인기 만점. “승강장에 포도나무가 있어요. 가까이 가면 진한 포도 향이 나죠. 영동군이 포도로 유명하거든요. 도깨비방망이를 닮은 박도 있어요. 감나무, 모과나무를 비롯해 다양한 꽃도 가득하답니다.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두가 승강장 구석구석을 재미있게 둘러보는 모습을 보면 흐뭇하죠.” 황간역 특유의 분위기는 입소문을 타면서 사진작가들의 출사지로도 인기가 높다고 한다.
하루 15회, 무궁화호가 황간역에 정차한다. 하지만 이 외에도 경부선의 한 길목인 이 역을 지나는 열차는 많다. 그러나 빠르게 지나갈 때는 역의 진면목을 알 수 없는 법. 황간역이 전하는 옛 정취를 오롯이 누리고 싶다면 이곳에 하차해보자. 마음속 고향 역에 첫걸음을 내딛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