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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춘철도는 단기간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토착 자본과 오랜 시간 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지역 주민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셈. 춘천번영회를 중심으로 경춘철도기성회가 조직되어 철도 부설을 위한 기초 조사에 나선 것을 시작으로, 이후 기나긴 과정을 거쳐 경춘철도는 1939년 7월, 드디어 개통의 빛을 보게 된다. 그리고 현재 숱한 변화를 거친 경춘선은 복선 전철 노선으로 여전히 서울과 춘천을 오가는 통로가 되고 있다.

글과 사진 배은선(수도권광역본부)

뭔가 다른 경춘철도

우리나라 첫 철도인 경인철도를 필두로 경부철도와 경의선, 마산선, 호남선, 경원선, 중앙선(경경선) 등 대한제국 시기나 일제강점기에 건설된 철도치고 우리 민족의 피눈물이 배어 있지 않은 노선은 없다. 대부분 식민지 철도로 부설되어 자원 개발과 수탈 도구로 이용됐을 뿐 아니라, 철길이 놓이는 과정에서도 착취와 강제 동원이 지속적으로 이뤄졌다.
경춘철도(지금의 경춘선)가 예외적으로 국내 자본의 참여로 건설했다는 것은 기존 철도사의 기록을 통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다만, ‘국내 자본’이라고 해봐야 경춘철도 건설을 처음 추진한 1920년대에는 대부분의 자본을 일본과 일본인이 차지하고 있었으니 어차피 민족자본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었다. 실제 1924년 4월 5일 자 매일신보(每日新報) 기사를 보면, 국내 사설 철도 자본의 84%가 일본 본토인의 것이고, 14%는 조선 내 일본인 소유, 나머지 2%만이 조선인 소유로 되어 있다.
그런데 자료를 조사하면서 알게 된 것은 경춘철도가 단기간에 이뤄진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과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마침내 이뤄낸 지역 주민과 토착 자본의 노력이 결실을 거둔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제 그 과정을 개략적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자료 조사는 주로 당시에 발행한 매일신보라는 신문을 통해 이뤄졌는데, 이 신문이 총독부 기관지였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객관적 사실을 확인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본래 강원도 감영은 원주에 있어서 이곳이 강원도의 행정 중심이었다. 그런데 1896년 춘천에 강원도 관찰사를 두게 된 이후 일제강점기에 도청 소재지로 정해지면서 춘천은 주요 도시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지역에 본격적인 철도 부설이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920년 일본의 자본가 10여 명이 경성과 춘천을 잇는 전기철도 부설을 위한 회사 설립 면허를 출원하면서부터다.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전기철도를 구상한 배경에는 화천 지역에서의 수력발전이 수익성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 전기철도 운영 외에 부대 사업으로 춘천 지역 전등 영업, 간이 수도 및 제재 사업도 계획하고 있었고, 장기적으로 홍천과 인제에 발전소를 추가로 건설해 춘천~양양 간 동해안 횡단철도까지 운영할 야심을 품고 있었다. 이들은 1920년 10월 18일 경성부 동부에서 춘천까지 연장 79.8km, 궤간 1.067m의 경편철도 부설 허가를 받았다. 1921년 3월 28일 자 매일신보에는 발전소와 철도 부지에 대한 조사를 하기 위해 일본에서 기술자가 왔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런데 허가를 받은 이후 만 5년이 넘도록 공사 착공은커녕 회사 설립도 지지부진하자 춘천 지역 번영회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총독부가 강원도청 소재지를 춘천에서 철원으로 옮길 것을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이 도화선이 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철원은 금강산전기철도가 개통된 이후 급속한 발전을 이루고 있었다.
한동안 춘천에서는 진정위원을 선출해 경성에 파송하고, 당시 오무라(大村卓一) 철도국장이 춘천을 방문하는 등 당장이라도 철도를 놓을 것처럼 들떠 있었다. 그러나 결국 1926년 9월 23일 자 조선총독부 관보에 면허 실효 공고가 남으로써 경춘전기철도주식회사의 꿈은 끝내 무산되고 말았다.

경춘철도주식회사 주식 모집 광고(1936년 6월 9일, 조선시보). / 경춘철도주식회사 주식 100주권(1936년 10월 1일 발행). / 경춘철도 조선인 주주 현황 보도(1936년 7월 21일, 매일신보).

1935년 여름, 춘천에 다시 철도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남의 힘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철도를 놓자는 주장이 나왔다. 9월에는 춘천번영회를 중심으로 경춘철도기성회가 조직되어 일본인 7명, 조선인 3명으로 준비위원까지 선출했다.

실패를 교훈 삼아

그로부터 약 9년이 지난 1935년 여름, 춘천에 다시 철도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남의 힘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철도를 놓자는 주장이 나왔다. 9월에는 춘천번영회를 중심으로 경춘철도기성회가 조직되어 일본인 7명, 조선인 3명으로 준비위원까지 선출했다. 이들은 철도국을 방문해 경춘철도 부설을 진정할 뿐만 아니라 활동비를 거출해 철도 부설을 위한 기초 조사에도 나섰다. 이듬해인 1936년 1월 19일 자 보도에는 기성회가 주식 모집에 착수해 벌써 4만 주나 모았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는 지역 주민이 철도 부설을 위한 집단 민원을 내는 양상을 뛰어넘어 스스로 철도를 부설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준 것으로 큰 의미가 있다. 신문은 주식 모집이 순조롭게 진척되어 5월에는 기성회에서 토지 매수를 개시했다며 춘천역이 들어설 전평리 일대에 대한 협상 소식도 전했다.

기성회를 통한 철도 부설 운동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것은 같은 해 5월 하순이었다.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이 자본금 1,000만 원의 경춘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해 철도 부설을 추진하기로 한 것이다. 이미 확보한 자본은 식산은행이 인수하기로 하고, 창립위원장과 사장도 내정됐다. 1936년 6월 5일에는 경춘철도 발기인회에서 경춘철도 면허를 신청했으며, 6월 9일 자 신문에는 경춘철도주식회사 주식 모집을 알리는 광고가 실렸다. 일제의 식민지정책 금융 부문 수행 핵심 기관인 조선식산은행이 철도 부설을 주도하게 되었으니 사업은 마치 날개를 단 듯 일사천리로 추진되었다. 7월 13일 청량리에서 춘천에 이르는 연장 92.2km, 궤간 1.435m, 증기와 경유 철도 부설 면허를 얻었으며, 그에 앞서 경성~춘천 간 93km에 대한 실측을 6월 25일부터 시작했다.

7월 21일 자 조선중앙일보와 매일신보에는 경춘철도 대주주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자본금 1,000만 원에 주식 수는 총 20만 주(주당 50원)인데, 그중 17만 주는 발기인 및 찬성인 몫이고 나머지 공모주가 3만 주다. 그중에는 조선인 주주도 다수 포함되어 있어 최대 5,000주를 보유한 사람이 2명이나 있고, 100주 이상 가진 사람을 합치면 모두 91명에 3만4,560주가 조선인 몫이었다. 만약 100주 이하의 소액주주까지 합치면 적어도 4만 주 정도를 이른바 민족자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며, 이는 전체의 20%에 달하는 상당한 지분이다.

이 신문이 1924년에 국내 사설 자본에서 조선인 자본이 차지하는 비율이 2%에 불과하다고 밝힌 것을 생각하면, 경춘철도 부설에 지역 주민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참여했는지 알 수 있다. 1936년 11월이 되자 2차에 걸친 노선 실측이 끝났다. 당초 경춘철도는 경성 쪽 시발역을 청량리역으로 잡고 있었지만, 이 계획에 변동이 생겨 6월 15일 공식적으로 기점을 제기정(현 제기동)으로 옮겨 선로 연장이 95.6km로 늘어났다(부설 결과 선로 연장은 93.5km). 그리고 1939년 완공을 목표로 일제히 착공에 들어갔다. 착공할 당시만 해도 1939년 4월에는 철도가 개통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국책은행이 관여하는 철도 공사인데도 전쟁이 확대되면서 노동력과 공사 자재를 확보하는 일이 어려워 완공 시기는 점점 늦춰질 수밖에 없었다. 1938년 연말에는 춘천역 건설을 위한 착공에 들어갔고, 1939년 3월 전체 노선에 대한 편재를 개시하고, 4월 중순부터는 언론사 기자단에 대한 시승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7월 22일, 드디어 경춘철도 개통식이 춘천역에서 300여 내외 귀빈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7월 24일에는 성동에서 춘천까지 93.5km 구간의 24개 역이 영업을 개시했는데, 초창기 보유 차량은 증기기관차 4대, 객차 6량, 화차 35량이었다. 하루 6왕복 운행했으며, 성동발 첫차는 07시 15분에 출발해 3시간 만인 10시 15분에 춘천역에 도착, 춘천발 첫차는 06시 35분에 출발해 09시 32분에 성동역에 도착했다.

 

경춘철도, 그 밖의 이야기

1936년 11월 이후 신문에는 경춘철도주식회사가 철도 영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기존 춘천 시내에 있던 자동차 회사 두 곳을 인수한다는 소식이 실렸다. 철도 운송 외에 양대 자동차 운송 회사를 인수함으로써 춘천과 인근 지역을 잇는 육로 교통 전체를 장악하게 된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1939년 6월 1일 자 매일신보에 실린 지하철 부설 계획이다.

경춘철도주식회사가 제기정에서 동대문을 잇는 지하철도 부설 계획을 세우고, 1941년 개통을 목표로 총독부에 허가원을 제출했다는 것이다. 이 의욕적인 계획은 침략 전쟁이 중국 내륙은 물론 동남아로 확산되고 끝내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면서 실현되지 못했지만, 이것이 계획대로 진행되었더라면 우리나라의 지하철 건설 역사는 지금보다 30년 이상 앞당겨졌을 것이다. 광복 이후 미 군정청은 사설 철도 국유화 방침을 세우고 당시에 남아 있던 조선철도, 경남철도, 경춘철도 등 사설 철도 회사가 운영하던 노선을 모두 흡수 합병하기로 했다. 1946년 5월 7일 군정청 법령 제75호 ‘조선철도의 통일법령’이 공포되면서 1946년 5월 17일부로 모든 사설 철도가 국유철도에 합병되었다. 사설 철도 경춘철도가 국유철도 경춘선으로 변신하는 순간이었다.

선로 변의 아름다운 풍광과 유원지로 유명하던 이 노선은 광복 이후 경제 발전기를 거치면서 젊음의 해방구로 깊이 각인되었다. 주말이 되면 춘천 가는 통일호나 무궁화호가 떠나는 청량리역 시계탑 앞은 발랄한 옷차림의 청춘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명목은 아무래도 좋았다. MT든 수련회든, 혹은 이별 여행이든 데이트든…. 많은 변화를 거쳐 지금의 경춘선은 중앙선 망우역에서 분기해 춘천역에 이르는 80.7km의 복선 전철 노선이 되었다. 수도권 전철이 상봉~춘천 간을 수시로 오갈 뿐 아니라 일부는 청량리역까지 운행하고 있다. 또 준고속열차인 ITX-청춘이 용산~춘천 간을 쌩쌩 달리고 있다.
정겨웠던 통일호나 무궁화호는 더 이상 보이지 않지만, 통기타 메고 다니던 경춘선 낭만족들은 어느덧 머리가 희끗희끗한 지공거사(地空居士)가 되어 오늘도 춘천으로 향한다. 젊음이 그립지 않은 것은 아니나, 냉난방 빵빵한 전철을 타고 닭갈비며 막국수 먹으러 떠나는 길도 그리 서럽지는 않다.

1 경춘선을 타기 위해 청량리역에 모인 주말 여객 풍경(1972년). / 2 경춘철도 노선도(1939년 4월 16일). / 3 완공을 앞둔 성동역과 춘천역(1939년) / 4 경춘선 신형 무궁화호 동차 운행(1984년 11월 26일). / 5 영업이 종료된 구 춘천역(2005년 9월 30일). / 6 경춘선 복선 전철 개통식(2010년 12월 21일).

주말이면 춘천 가는 통일호나 무궁화호가 떠나는 청량리역 시계탑 앞은 발랄한 옷차림의 청춘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명목은 아무래도 좋았다. MT든 수련회든, 혹은 이별 여행이든 데이트든…. 많은 변화를 거쳐 지금의 경춘선은중앙선 망우역에서 분기해 춘천역에 이르는 80.7km의 복선 전철 노선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