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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인 소나타

글 손민두 기자(광주전남본부) 일러스트 박경진

돌이켜보면 내게도 순수의 빛으로 꿈을 품고 미래를 향해 가슴을 활짝 열던 때가 있었다. 그때가 윤희와 만나던 빛나는 시절이었다. 하지만 윤희와의 사랑은 내가 딛고 선 현실에선 도저히 열매를 맺을 수 없는 헛된 꿈이었다. 결국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상처만 남았다. 어린 나이에 경험한 사랑과 이별, 그리고 방황. 나는 일찍이 음악의 위로가 없었다면 단 한순간도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고통의 시간을 경험했다. 그만큼 내게 음악은 간절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남보다 나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 작곡가의 길을 걸어왔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나의 음악 자서전은 내 삶을 표현한 표제음악이라기보다 내 영혼을 위로하는 환상곡이라 할 수 있을 터였다.

나는 아라와 섬을 한 바퀴 돌고 숙소로 돌아와서도 악보를 꺼내 들고 코다 앞을 장식할 카덴차 생각에 여념이 없었다.
“무슨 악보예요?”
아라가 악보에 눈길을 주며 말했다.
“음악 자서전.”
“와! 언제부터 쓰셨어요?”
”오래됐다. 그런데 이 코다 앞 마지막 카덴차 때문에 아직 미완성이야.”
“저도 한번 볼까요.”
아라는 한참이 지나도록 받아 든 악보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세심하게 살폈다. 가끔 손가락으로 소파를 두드리며 음을 가늠해보기도 했다.

“이 미완성 카덴차, 제가 즉흥으로 연주하면 안 될까요?”
순간, 나는 눈이 번쩍 뜨였다. 어려운 숙제가 순식간에 풀린 느낌이었다.
“오, 그래! 내가 그 생각을 못 했구나.”
나는 갑자기 흥분되기 시작했다.
“원래 카덴차는 작곡가보다 연주자의 몫이잖아요.”
“그렇지. 그럼 내 이 곡을 너한테 선물로 주마.”
“정말요?”
아라의 까만 동공이 커지며 얼굴 가득 환한 미소가 돈다. 지금껏 나를 만나 가장 기쁜 표정이다.
“근데 제가 받아도 될까요?”
“그럼. 이 곡이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우리 아라 손에 연주되는데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지.”
“무슨 말씀을요. 작곡이 얼마나 힘든데, 이렇게 큰 선물을 주시다니.”

나는 진즉부터 어린 아라에게 나의 사랑 이야기를 모두 털어놓는 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앞으로 아라가 나이를 먹으며 천천히 이해하고 받아들여도 될 터였다. 다만 아라가 이 곡을 연주하며 상처와 고독으로 얼룩진 나의 삶을 조금이라도 받아들이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는데, 그 시간이 빨리 찾아온 것 같아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래, 나와 함께 이 섬에 와주어서 정말 고맙다.”
나는 살며시 아라의 손을 끌어당기며 아라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 곡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네 엄마의 슬픈 사랑 이야기가 들어 있단다. 네 마음이나 느낌을 카덴차로 표현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구나.”
“그럼요. 근데 전 슬픔과 비탄의 테마를 보석처럼 아름답게 연주할 거예요.”
“아!”
나도 모르게 탄식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렇다. 어찌 내 삶에 슬픔과 고통만 있었으랴. 비에 젖지 않고,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다고 했다. 어차피 삶이란 슬픔과 기쁨, 고통과 환희 사이를 시계추처럼 왕복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내 비록 비탄과 고독으로 얼룩진 삶을 살았지만 내 열정을 불태운 음악이 있었고, 또 지금 눈앞에 아라가 있지 않은가.

“오! 그래, 그리 해준다면 엄마 아빠의 삶이 꼭 슬프지만은 않을 거야. 고맙다, 아라야.”
눈물이 고이는지 아라의 눈빛이 불빛에 반짝인다. 나는 아라의 손을 다시 잡고 말을 이어갔다.
“네 엄마한테 예전에 한 다짐이 있었다. 세상이 내게 길을 내주지 않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길을 내고야 말 거라고. 그 약속을 꼭 지킨 건 아니지만, 그래도 네 엄마 덕분에 내 한계치의 눈금을 조금씩 높여가며 지금의 내가 됐다.”
아라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끝내 눈물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잠시 후, 아라가 고개를 들어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제 그만 머리 기르시면 안 돼요?”
아라의 말에 나는 습관적으로 겸연쩍어하며 내 민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나 때문에 머리를 깎이고 억지 유학을 떠나 일찍 세상을 떠나버린 윤희에 대한 속죄 때문에 머리를 기를 수가 없다.
“응, 때가 되면….”
나는 아라의 가냘픈 손을 끌어당겨 두 손으로 감싸 쥐고 힘을 주었다.

다시 하루 치 밝음의 시작을 알리는 희붐한 빛이 창밖에 드리운다. 오늘 우리는 육지로 떠나는 날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또다시 바다로 눈을 돌렸다.
바다엔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하늘과 바다가 빈틈없이 입을 맞춰 잔잔한 수평선을 만들었다. 어서 내 곡이 무대에 올라 나보다 윤희의 영혼을 위로하는 진혼곡이 되었으면. 벌써 연주를 끝낸 아라를 향해 청중의 환호와 박수 소리가 음악홀에 울려 퍼지는 듯하다.

 

-연재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