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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아 헤이거코헨 지음 / 강수정 옮김
지호 / 2004년 3월 25일 출간

<반짝이는 박수 소리>

세상에는 듣기 싫은 소리까지 들으며 살아야 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한편에는 그 어떤 소리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책은 필자 코헨이 어린 시절, 소리가 없는 세계에서 성장하는 것을 바탕으로 고요한 침묵의 세계를 담백하게 담고 있다.

글 정승화 기자(부산경남본부)

청각장애인이 되고 싶었던 리아 코헨의 어린 시절

저자 리아 코헨은 어린 시절, 소리가 없는 세계에서 성장했다. 리아와 그의 부모는 건청인*이었으나, 청각 장애가 있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영향 그리고 청각장애학교의 교직원이던 아버지 때문에 특별한 문화를 접하게 된 것이다. 책은 리아 코헨이 태어나기 훨씬 오래전 할아버지 샘 코헨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청각장애인이던 리아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공원에서 만나 서로를 사랑하게 된 사연은 그야말로 한 편의 감동적인 소설과 같다.
어둠 속에서는 수어*를 주고받을 수 없어 밝은 빛 아래서만 사랑의 밀어를 나누던 연인은 어둠이 깃들어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오면 작별 인사만 1시간이나 했다. 헤어지기 싫은 마음, 관계의 고리를 끊고 공허한 밤 속으로 들어가길 꺼리는 그들의 작별 인사는 늘 그렇게 길었다. 리아 코헨은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부터 이 고요한 세계를 동경했다. 학교에서 또래 아이들과 소꿉장난하듯 함께 수어를 하며 놀았고, 친구들처럼 보청기를 끼고 싶어 작은 돌을 귀에 넣었다 된통 혼나기도 했다. 리아는 이런 각별한 애정을 바탕으로 들리지 않는 세계를 담담하게, 그리고 아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소리가 없는 세계, 그 속에 사는 사람들

책은 그녀의 어린 시절 추억이 담긴 렉싱턴 청각장애학교를 무대로, 그녀의 조부모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 학교를 거쳐간 장애인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린다. 고교 졸업 전 비행사 자격증을 따 전 세계를 누비는 청각장애인의 전설 알렉, 네 자매 가운데 둘만 청각 장애가 있어 더욱 각별한 사이가 된 소피아와 이리나 자매, 슬럼가 태생으로 가난 속에서 비행소년으로 살아가고 있었지만 렉싱턴에 와서 우수한 학생으로 거듭난 흑인 소년 제임스, 청각장애인 부모 밑에서 귀가 들리는 아들로 태어나 평생 장애인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온 저자의 아버지 오스카까지, 다양한 사람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흔히 대부분의 사람은 청각장애인과 함께하려면 무척 힘들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편견일 뿐, 나에게도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10여 년 전, 수어통역센터에서 봉사 활동을 했을 때다. 1년에 몇 번 행사가 있는 날이면 센터는 바빠진다. 농통역사*인 간사님이 간결하면서도 분주한 손짓으로 나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하다가 내가 수어를 이해하지 못하고 멀뚱히 서 있으면 “아우우” 하시며 이마를 짚는다. “바보, 수어 열심히 안 배울래!” 워낙 털털하고 터프한 성격의 간사님에게 수어가 익숙하지 않던 나는 이런저런 놀림과 구박 아닌 구박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농인 문화에 쉽게 적응하고 수어도 빨리 배운 것이 나에게 수어를 가르쳐주신 간사님의 구박 덕분이니 크게 웃고 볼 일이다. 소리가 없는 세계, 그 속의 사람들을 들여다보면 오히려 건청인보다 더 격렬하고 힘차다.

당신은 어떤 언어로 이야기하나요?

작은 감동으로 채워가는 장애인들의 사연 사이로 저자는 ‘미국 장애인 정책의 변천 과정’과 ‘장애 문제에 올바로 접근하기 위한 방안’을 끼워 넣었다. 미국은 장애 아동이 일반 학교에 다니며 사회에 적응하도록 ‘통합 교육’을 법으로 정하고 있지만, 저자는 일반 학교에서 주눅 들어 있던 소피아가 렉싱턴 학교로 전학 온 뒤 적극적이고 활발한 성인으로 커간 사례를 소개하며 미국식 통합 교육 이념을 비판하기도 한다. 이 책의 배경인 렉싱턴 청각장애학교 역시 전통적인 구화* 교육기관이었기 때문에 수어를 금지하고 구화를 사용하도록 했다. 이 당시 이들이 생각하는 수어는 미개하며 야만적인 언어였기 때문이다. 리아 코헨의 아버지 오스카는 렉싱턴 교육처장으로 오랜 세월 일하면서 학교의 정체성에 의문을 가지고 늘 진지하게 고민한다.
우리나라 역시 구화 중심의 교육을 한다. 청각 장애가 있는 사람도 훈련을 통해 구화를 배우면 건청인처럼 말하고 듣는 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오해하곤 한다. 하지만 들리지 않는 상태에서 입술을 읽는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수어통역센터에서 방과 후 학습을 통해 가르치던 아이가 있다. 항상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사랑해”라는 말을 아무에게나 남발하는 호영(가명)이란 이름의 밝은 악동이다. 오후가 되면 학교를 마치고 오는 호영이를 데리러 항상 마중 나가야 했는데, 엄마 손을 뿌리치고 곧잘 도망갔기 때문이다. 무임승차를 하며 이곳저곳을 제집 드나들 듯하는 호영이도 문제지만, 더욱 큰 문제는 호영이가 청각 장애 아동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호영이를 무사히 데리고 와 도망간 이유를 물으면 언제나 같은 대답이 나온다.
“심심해서.” 이 말은 단순한 열두 살배기 꼬마의 장난스러운 대답이 아니었다. 호영이의 부모는 아들이 일반 학교에 진학해 건청인 친구들과 함께 생활하며 장애를 극복하길 바랐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호영이는 선생님, 친구들과 제대로 소통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하지 못했다. 외국인의 말소리를 한 번도 들어보지 않고 외국어를 소리 내어 말할 수 있을까? 자신이 어떤 발음으로 말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정확한 발음을 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주변 말소리를 듣지 못하는 청각장애인에게 통합 교육이나 구화를 강요하는 건 폭력이 될 수도 있다. 저자는 “내 어린 시절의 꿈은 커서 청각장애인이 되어 멋지게 수어를 나누는 것이었다”라고 말한다. 그 말이 이 책 속에서는 장애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나무라는 죽비 소리로 들린다.

돌이켜 보며

사람들은 흔히 청각장애인의 언어(수어)를 가리켜 “소리 없이 이해할 수 있는 온기 가득한 언어”라 말한다. 언젠가 진주역에서 호영이를 마주친 적이 있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수어를 하는데, “KTX를 타고 외할머니 댁에 가서 신난다”며 천진난만하게 웃음 짓는 모습에서 따뜻한 마음이 느껴졌다. 이제 도망 안 가느냐고 물으니 친구가 생겼고, 병원에서 일하고 있단다. 손가락으로 숫자를 세던 꼬마 아이가 잘 자란 모습을 보니 내 일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말할 수 없고 들을 수도 없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욱더 밝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반짝이는 손동작으로 다정한 속삭임을 전하는 사람들. 이들 속에서 나의 어둔 가슴은 반짝이며 조금씩 소리 내어 빛나기 시작한다.

건청인: 청각장애인에 상대해 청력의 소실이 거의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
수어: ‘수화 언어’를 줄여 이르는 말.
농통역사: 청각 장애가 있는 농인으로 수어 통역 자격이 있는 자.
구화: 상대의 말을 입술의 움직이는 모습과 얼굴 표정 등으로 보고 이해하며, 청각 통로를 통해 습득한 음성언어로 발어(發語)하는, 농아의 의사소통 방법 중 하나.

1월호부터 사보에 새롭게 연재하는 ‘구해줘, 북스’는 박병남, 정승화 사보 기자가 격월로 함께합니다.
사보 기자의 시선으로 탐독한 책 한 권에 관한 이야기, 독자 여러분에게 ‘이달에 읽어보면 좋을 책’으로 추천합니다.(편집실)